의병의날 기념 특집 (2)
의병의날 기념 특집 (2)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1.06.07 21:40
  • 호수 8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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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려 보는 장성 의병사 2
호남창의회맹소 석수암터
호남창의회맹소 석수암터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아무런 교훈도 남기지 못한다>

1894423일 동학농민혁명군(이하 농민군)은 황룡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보다 앞서 1894년 전봉준이 주도한 농민군이 13일 고부에서 혁명을 시작한지 보름만에 이춘영은 장성과 전남지역에 연락하여 황룡면 월평리에 동지를 규합하였다. 농민군은 421일 장성 황룡 월평에서 진을 쳤고, 관군은 422300여 명을 동원하여 공격명령을 내렸다.

423일 농민군 4~5천 명이 황룡에 집결하여 점심 식사 중인 것을 탐지한 관군이 대포 2문으로 포격을 가하면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관군의 수는 농민군에 비해 훨씬 적었지만 그들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최정예부대였다. 이 싸움에서 크게 승리한 농민군은 대포 2문과 양총(洋銃) 1백여 정을 노획하여 동학군의 전력을 강화했으며 나흘 뒤 428일 농민군이 호남의 수도인 전주성을 함락하는 결정적인 바탕이 되었다. 황룡전투는 동학농민혁명의 4대 전투 가운데 하나로 전주성 함락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싸움이었다.

농민군에 가담하여 희생된 장성사람은 30~40여 명에 이르고, 농민군에 참여한 인물은 79명으로 조사되고 있으나 실제로 농민군에 참여한 농민은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장성 황룡전투와 관련한 기록은 많지 않다. [이춘영의 東學略史]에 의하면 삼계면 출신인 화암 이춘영이 천도교 제2대 교주인 최시영을 만나 입교한 뒤 그를 통해 입교한 사람이 1천여 명에 달했다고 하는 내용이 있어 장성에서 많은 천도교인들이 황룡전

 

투에 가담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송사 기우만
송사 기우만

<동학농민혁명의 의의>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운동으로 3월의 제1차 고부봉기와 9월의 제2차 전주봉기로 나뉜다.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은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반봉건과 서학, 일본을 배척하는 반외세 운동으로 세를 확대해갔다.

조선은 1864년 교조 최제우를 혹세무민으로 처형하고 동학교도들을 탄압했으나 제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농민들에게 더욱 확산 조직화되었다. 18941월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이 되어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 관아를 습격해 조병갑의 횡포를 시정하고, 외국 상인의 침투를 금지하라는 요구를 했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 관련자들을 역모죄로 몰아 혹독한 탄압을 가하자 321일 최시형의 탄생일을 기해 고부 백산에서 궐기하여 정읍, 고창, 영광, 나주, 태인, 부안 그리고 장성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했다.

관군은 농민군과 전주화약을 맺어 폐정개혁안 12개 항목에 합의하고, 호남지방 각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폐정개혁안 내용 중에는 탐관오리 엄벌 노비문서 소각 청상과부 개가허용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 등 매우 획기적인 개혁안이 포함되어있다.

성재 기삼연
성재 기삼연

2차 봉기는 일본군의 내정간섭이 강화되면서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갑오개혁을 강행한 것을 전해들은 전봉준이 삼례에서 집결하여 서울로 향했고, 충청도와 경상도 강원도에서도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우세한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패했고, 18951월 전봉준과 지도부가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져 동학혁명은 미완에 그치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은 구한말 의병활동과 천도교가 주도한 3.1만세운동 그리고 항일독립운동까지 이어지며 개혁과 독립을 가져온 단초가 되었다.

 

<황룡전투와 동학농민군>

황룡전투와 관련된 자료는 [동학사], [갑오실기], [봉남일기], [순무선봉진등록], [감결장성부], [선유방문병돈도상서소지등서], [각진장졸성책], [양호우선봉일기], [전라도각읍소착동도수효급소획물즙물병록성책] 등이 있다.

동학사는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한 오지영(1868~1950)이 쓴 것으로 일부 부정확한 부분이 발견되었고, 장성 황룡전적과 관련한 내용은 빈약한 편이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 전체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갑오실기는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갑오년 3월부터 12월까지 중요한 사실을 날짜별로 기록한 책이다. 농민군의 활동상황과 진압대책에 관한 감영 및 순무영의 보고서 등을 수록하고 있다.

송흥진 (북하면 출신)
송흥진 (북하면 출신)

 

순무선봉진등록은 전라도 선봉장 이규태가 2차 동학농민혁명 진압과정에서 조정 등 관청과 주고 받은 공문을 수록한 것이다. 이규태는 자신의 예하 부대장과 각 읍면동에 보낸 문서 등에서 농민군이 물자를 염출하고 보유하고 있는 말과 농민군 수를 기록한 감결장성부를 남기기도 했다.

전라도각읍소착동도수효급소획물즙물병록성책은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전라도 각지에서 체포한 동학도의 성명, 수효와 처리사항, 노획품의 수량 및 노획자 등을 중앙에 보고하기 위해 기록한 자료이다. 주요인물의 경우 지역, 직책, 체포한 날짜 등을 기록하였다.

봉남일기는 장성읍 장안리에 거주하던 봉남 변만기(1858~1924)선생이 1894년부터 1923년까지 30년 동안 쓴 일기인데 6.25 때 소실되어 일부분만 전하고 있다. 변만기는 신묵재 태용의 아들로 면암 최익현의 제자가 되었다. 봉남일기에는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학군의 2차 봉기를 시작으로 그들의 동태와 관군·일본군과 농민군과의 접전상황을 비롯해 이에 대한 지방민들의 동향 등이 생생하게 적혀 있어 공식적인 관기록에 의존해 온 동학운동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농민군의 장성활동 사항이 비교적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구한말 의병활동>

장성의 의병활동에 관한 자료는 1931년 간행한 [송사집]에서 펴내지 못한 송사 기우만의 [기우만연보초고][기삼연실기] 그리고 봉서변상철, 봉남 변만기, 회산공 변승기 3부자가 기록한 봉서일기, 봉남일기, 회산일기와 기재의 [식재집] 등이 있다. 기재의 아들인 기산도는 을사5적 중의 한 명인 이근택을 처단하였으며 그의 사돈은 창평의병장 고광순이다. 고광순은 호남창의회맹소의 맹주인 기삼연과 함께 지리산에서 순국하였다.

18958월 일본군은 궁궐을 침입하여 왕비인 민비를 시해하고, 왕을 협박하여 친일내각을 구성하였으며 단발령을 내렸으나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신적 무장이 된 유생들의 반감을 가져왔다. 18961월 국모(민비)시해의 원수를 갚고, 친일 각료들을 처단하고자 충청도 홍성에서 시작한 의병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장성에서는 위정척사운동을 주장했던 노사 기정진의 문인들이 가장 먼저 나섰다. 노사의 손자요 제자인 송사 기우만과 족질인 성재 기삼연, 노사의 제자인 녹천 고광순이 전남의병의 주동자였다.

19051118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은 사실상 국권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매국노 암살, 의병항쟁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 의병활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19079월 삼계면 수연산 석수암에 모여 기삼연이 맹주가 되어 호남창의회맹소를 발족하여 의병활동에 들어갔다.

 

<일제하 독립운동>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 합병하고, 조선은 나라를 잃었다. 서삼면 출신인 반학영(하경)선생은 내시부관원으로 들어가 숭록대부(1)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조선이 강제 합병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95일 파주 삽다리 장터에서 할복 자결하였다.

19193.1만세운동 때 북이면 모현리 주민들은 사거리 장터에 나가 만세운동을 하였고, 삼서면 소룡리 주민, 장성읍(성산) 만세시위 등이 이어졌으며 일부는 광주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에 결성된 신간회는 학생운동과 노동자와 농민운동을 지원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장성지회는 192712월에 결성되었고, 부회장 송종근, 집행위원장 김시중 등이 구속되었다.

1926년 결성된 성진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는데 여기에 참여한 장성사람이 김기주, 나승규, 김종선, 송종근 등이었고, 독서회에 참여해 징역형 등 처벌을 받은 사람은 송동식, 이영백, 김병기, 김종기, 최달봉, 박중진 등이다. 이들 외에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해 실형을 받았거나 퇴학을 당한 장성사람은 변진설, 기회준, 김천기, 김일중, 김관수 등이 있다.

국외에서의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장성사람으로는 이만준(애국단체 흥업단원으로 회계 및 독립자금 모집), 변극(상해에서 한인청년동맹 조직), 서진순(김원봉 의열단원) 등이 있다.

1938년 기환도, 나금주 등이 독서회를 다시 조직하였고 1940년 무등회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였는데 그 뒤를 이은 기영도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환도는 독립을 겨우 1년 앞두고, 1944년 고문치사를 당하였고, 기영도는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한말 의병활동과 관련해 서훈을 받은 인물은 성재 기삼연, 송사 기우만 외 34명이며 3.1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서훈을 받은 인물은 고용석 등 18명이며 그 외 독립운동과 관련해 서훈을 받은 인물은 김기주 외 26명이다. 장성문화원과 무등역사연구회가 공동으로 조사한 [장성의병사료조사6]에 의하면 독립운동 미서훈자는 기산도선생의 부친인 기재(1854~1921) 80명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월평초등학교 설립자이며 신간회 활동과 장성농민조합운동을 주도하여 징역형을 선고 받은 김시중 선생마저 누락되어 있다. 또한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된 나승주, 김종선 선생 등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장성의병사료조사에서 일부 누락된 부분은 보완하여 [장성의병사] 정립과 출간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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