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운문암 선원장인 정견스님에게 듣다
백양사 운문암 선원장인 정견스님에게 듣다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1.05.17 22:00
  • 호수 87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는 519일은 불기 2565년 부처님 오신날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혼란의 시대는 새로운 시대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앞으로의 세상 그리고 인공지능 시대에 불교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 백양사 운문암 선원장인 정견스님의 얘기를 들었다.

정견스님은 30년 전 백양사에서 혜권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운문암을 비롯해 전국의 선원에서 참선과 수행을 해온 수좌이다. 출가하여 계를 받을 때 은사인 혜권스님께서 불교의 수행 방법인 팔정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정견(正見)으로 수행의 근본을 삼으라는 뜻으로 정견이라는 법명을 받았다고 한다.

 

변동빈 : 스님 반갑습니다. 정진 중에 어려운 시간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스님께서 주석하고 있는 운문암은 근현대 많은 큰스님들께서 수행하고 정진하신 도량으로 알고 있습니다. 운문암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십시오.

 

정견스님 : 운문암은 고려 각진국사께서 백양사를 중건하신 다음 개원하여 스님들의 참선수행 도량으로 이어져 온 곳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소요대사, 진묵대사, 환양선사, 연담유일선사, 백파선사가 수행하셨고 근대에 와서는 혜안, 만암, 용성, 운봉 스님 등 걸출한 선사를 배출하신 학명스님께서 주석하셨으며 근래에 만암대종사와 서옹대종사께서 머무신 곳입니다.

백양사의 가풍은 선교쌍수(선과 교를 함께 공부)의 대표적인 도량으로 선사와 대강백이 함께 배출되었으며 선원에서도 벽암록이나 금강경오가해 등을 강의하였습니다.

 

변동빈 :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셨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만약 부처님께서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어떤 가르침을 가장 소중하게 설파하셨을까요?

 

<화합은 배려와 이해 그리고 용서에서 비롯된다. 그래야 공생하고 공존할 수 있다.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인간의 화합, 자연과의 화합이다>

 

정견스님 : 불교 교단을 상가(僧伽)라고 하는데 이는 화합중(和合衆)이라는 뜻으로 무엇보다 화합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화합은 배려와 화해 그리고 용서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화엄경에 상입상즉(相入相卽)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상대방에게 들어가서 하나가 된다내가 너이고 네가 나이며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등이란 개성이 다르고 기질이 같지 않아도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것을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코로나19시대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인간은 물론 이 세상에 모든 생명을 함께 존중하며 공존하고 공생하는 가르침은 2500여년 전이나 지금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변동빈 : 2500여년 전에 부처님께서 오시고, 공자와 맹자 그리고 예수와 마호메트 등 인류의 스승으로 불리는 분들은 대부분 2000년 이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때보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되었고 지능도 높은 지금 시대에는 왜 이 시대를 계몽시킬 스승이 나타나지 않는 걸까요?

 

정견스님 :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이기적 발현도 커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 동물입니다. 동물들은 배가 부르면 욕심을 내지 않아요. 그런데 인간은 배가 불러도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바로 탐심 때문이고, 탐심이 채워지지 않아서 화를 내고, 그 화로 인해 지혜의 싹을 자르게 됩니다. 지혜가 없으니 바르게 볼 수 없고, 바르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탐심을 반복합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매 순간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며 변화하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리석어 변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란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무아란 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무와 내가 무관한 것 같아도 인간은 산소를 마셔서 탄소를 내뿜고 나무는 탄소를 들이켜 산소를 내뿜어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누가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과 공존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변동빈 : 코로나19로 인해 종교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온라인 법회와 몇몇 스님들의 유튜브 법문이 인기를 끌기도 합니다. 또한 혼란의 틈새를 노린 광신자 집단도 횡행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급변하는 이 시대에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정견스님 : 독일에 갔을 때 유럽에서는 인지신학(認知神學)이 매우 발달해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종교가 초논리나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죠. 인간의 사고 안에서 신의 섭리를 이해하고 상생하는 길을 가는 겁니다.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서로 다르다고 적대시하는 것은 상생의 반대인 상멸(相滅)이 됩니다. 이데올로기는 허구에 불과하는 것이지 실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연을 대할 때도 자연과 상생하고 공존해야만 하죠. 자연은 인간이 파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공생공존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공생을 깨뜨린 결과가 바로 지구 온난화이고, 잦은 바이러스의 확산입니다. 종교야말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보편적 지성이 함유되어야 합니다.

 

변동빈 : 불교의 국가인 미얀마에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많은 국민들이 학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얀마의 스님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 무자비한 만행을 묵과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는 것입니까?

 

<불교는 나눔과 자비의 종교. 인간을 인간답게, 인간을 더 나은 인간이 되게하는 도구이다>

 

정견스님 : 종교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인간을 더 나은 인간이 되게하는 과정이며 도구입니다. 그런데 종교 간의 대립에서는 매우 배타적이에요.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가장 적대적이고 배타적이죠. 미얀마는 수십 개의 부족이 이루어져 이룬 국가이고, 이슬람 부족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속사정을 깊이 살펴보지 않고 속단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더구나 민주화 세력과 무장한 이슬람 부족이 결합해서 상황이 복잡합니다. 하지만 불교는 나눔과 자비가 근본이고, 비무장한 국민에게 총을 쏘는 만행은 멈추어야 합니다. 다행히 젊은 스님들을 중심으로 평화시위에 참여하고 있으며 원로스님들도 평화시위를 지지하는 어떤 행동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변동빈 : 요즘에 불가에 수행가풍이 희미해지고 불교를 비롯해 기독교나 가톨릭 등도 세속화되어간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종교가 욕망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을 전하지 않고 소원(욕망)을 성취하는 기복으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지요.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이루는 길은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정견스님 : 우리나라가 일제식민지 과정을 지나 6.25라는 비극을 겪은 뒤 1960~70년대는 먹고사는 문제 곧 경제가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면 80년대에 들어서는 민주주의가 중요한 국민의 요구였습니다.

2017년 수십만이 운집해서 평화적으로 진행한 촛불시위는 우리나라가 세계를 지도해나갈 역량을 갖추었다는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저는 한국인의 촛불시위는 최초로 민주주의를 이끌어낸 프랑스 혁명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 국민들이 깨어있다는 것이고, 성숙해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이런 역량으로 더 나아가 나만의 행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에 재난이 일어나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연예인을 비롯해 기업인들이 기부하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나눔문화는 우리 사회를 더불어 같이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중요한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절대 혼자 누릴 수 없습니다.

 

변동빈 : 코로나19도 결국 인간이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 파괴한 자연환경의 반격이라고도 합니다. 지금 석탄에너지의 사용으로 인한 탄소발생으로 북극의 빙하가 녹아가고 지구의 온도는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본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해 이루어져, 관계는 평등해야 하며 평등이 무너지면 화합이 깨지고 화합이 깨지면 모두가 공멸하게 된다>

 

정견스님 :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이 우월하다고 여길 뿐이지 인간도 자연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며 모두가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 평등을 깨드릴 때 평화가 무너지고, 평화가 무너지면 싸움이 일어나며 싸움은 모두를 공멸하게 합니다. 지금도 더 많은 가축을 사육하기 위해 울창한 숲을 베어내고 옥수수와 콩을 심고 있습니다. 숲이 파괴되면 인간은 숨을 쉴 수가 없게 되는데도 말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니며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결국 자살행위나 다름없지요. 소비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검소함과 절제 속에서 만족을 얻는 생활 습관을 가져할 것입니다. 스님들의 발우공양은 음식을 버리지 않는 좋은 전통인데 코로나19 시대에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는 방법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변동빈 : 스님께서 정진하시며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소의경전은 어떤 것이며 그 가운데 한구절만 들려주십시오. 또한 스님께서 참선하실 때 드는 화두는 무엇인가요?

 

정견스님 : 절에서는 사시(오전9~11) 불공을 올립니다. 그 때 대부분 천수경을 봉송하는데 저는 금강경을 봉송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눈에 보이는 현상에 끌려가지 않고 여여하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임제종의 화두선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화두선의 창시자는 대혜종고 스님으로 그가 쓴 편지 [서장]은 불교대학에 필수 교과목 중에 하나입니다. 대혜스님의 간화선은 헤아리고, 차별하는 것이 없으며 분별심도 없는 절대적 의심을 자 화두로 가르치고 있는데

저 또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변동빈 : 요즘은 절에서 법회를 하거나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종교생활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정견스님 :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이라는 말이 있지만 집집마다 절을 만들라고 하고 싶습니다. 불상을 모시지 않더라도 차를 올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됩니다. 종교가 일상화되라는 것입니다.

또한 계율을 지키는 소극적 삶이 아니라 적극적 실천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불살생은 방생으로 호스피스 병동에서 간병하는 것도 방생이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도 방생입니다. 훔치지 말라는 계율은 나누고 베푸는 것이며 기부하고 보시하는 것입니다. 거짓말 대신 칭찬하고, 격려하며 위로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바로 적극적인 계율의 실천입니다. 그런 종교생활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변동빈 : 소중한 시간과 좋은 가르침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정견스님 : “나에겐 내가 없고, 이미 나 아닌 것들이 나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전라남도 장성군 영천로 168 3층
  • 대표전화 : 061-392-2041~2042
  • 팩스 : 061-392-2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변동빈
  • 법인명 : (주)주간장성군민신문사
  • 제호 : 장성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184
  • 등록일 : 2003-07-04
  • 발행일 : 2003-08-15
  • 발행인 : 류이경
  • 편집인 : 변동빈
  • 장성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성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snews1@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