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투항’에서 ‘도은정’으로 불린지 벌써 13년. 서삼면 대덕리 덕평마을 은정씨(38)는 그새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남편 이문수 씨와 두 딸, 그리고 막내아들은 은정 씨의 ‘삶의 의미’이자 든든한 지원군이다. 은정씨는 “결혼하고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한국말도 못 하고, 음식도 안 맞고 그래서 고향 생각만 하면서 지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일도 재미있고, 남편도 잘해주고, 딸들도 멀리 있기는 하지만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있고, 특히 우리 막내아들이 착하고 명랑하게 자라줘서 정말 고맙고, 하루하루가 바쁘지만 재미있어요” 은정씨는 한국말로 대화하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만큼 능수능란했고, 인터뷰 중간 선뜻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알맞은 단어를 생각하는 모습이 예뻐 보이기도 했다.
한국 음식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탓에 베트남식 음식을 주로 하는데, 가리지 않고 매번 맛있게 먹어주는 남편과 아이가 고맙기도 하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은정씨가 매년 빠뜨리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바로 김장이다. 은정씨는 “적으면 50포기, 많으면 100포기씩 김장을 해요. 직접 기른 배추로요. 남편이 어디서 먹어봐도 우리 집 김치가 제일 맛있대요. 김장할 때가 되면 베트남 친구들 몇이 모여서 함께 담그고, 또 친구들 김장할 때도 함께 도와주지요. 그래서 별로 힘들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나누기 좋아하고 붙임성 좋은 은정 씨는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인싸(인사이더라는 뜻.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을 뜻한다)’로 통한다. “고향 떠나 낯선 곳에서 사는 게 힘들고 외롭지 않냐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많아요. 물론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 사람은 누구나 어디서 살더라도 조금씩은 외롭고 힘든 거잖아요. 장성에서 살면서 제일 좋은 점은 외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오히려 도와주고, 나눠주고, 알려주려고 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다문화센터 선생님들은 가족 다음으로 고맙고 의지가 되는 분들이세요. 그래서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고요. 베트남 친구들이랑은 페이스북에서 주로 이야기를 나누고요” 은정 씨는 ‘장성 인싸’가 된 공을 ‘장성사람들’에게로 돌렸다.
은정씨는 4월부터 10월까지는 공심채, 콩, 고추, 참외, 멜론, 히카마(콩과의 덩굴식물, 천연 인슐린이라 불리는 이눌린 성분이 풍부해 당뇨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 등 베트남 채소와 과일 농사를 짓고, 10월부터 3월까지는 바나나잎에 싸서 찌는 찰밥이나 보석빵(녹두로 만든 소가 매력적인 이 음식 이름은 은정씨 아들이 지었다고 한다) 등 베트남 음식을 만들어 베트남 식료품 마트에 납품하는 것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들어오는 주문 물량을 맞추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은정씨는 이 모든 일이 남편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베트남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용기술을 배워 미용실을 운영하기도 했던 은정씨는 아들이 어렸을 때 직접 머리 손질을 해주곤 했는데, 지금은 바빠서 이마저도 하지 못한다고.
꿈을 말해줄 수 있냐는 질문에 은정씨는 아들이 지금처럼 예의 바르고 착하게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예쁜 미용실을 차리는 것을 꼽았다. 내심 ‘사업가’의 꿈을 키우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돌아오는 답은 의외였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바로 ‘고생하는 남편을 위해서’라는 것. 은정씨는 “저도 힘이 들긴 하지만 남편이 저를 도와주느라 너무 고생을 많이 해요.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 남편이 정말 힘들어지면 제가 미용실을 열어서 남편 어깨의 짐을 덜어주고 싶어요”라고 속내를 비쳤다.
은정씨의 씩씩하고 당당한 ‘타향살이’는 가족, 그리고 그녀를 ‘외국인’이 아닌 ‘이웃’으로 바라보는 ‘장성사람’들 덕분에 더 행복해질 일만 남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