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불교와 선(禪)에 담긴 생태지혜
기고 - 불교와 선(禪)에 담긴 생태지혜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21.01.24 22:12
  • 호수 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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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성균관대 초빙교수)
서재영(성균관대 초빙교수)

마음이 맑아야 국토가 맑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 온 세계는 백신개발에 사활을 걸고, 각국은 접종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대응의 근저에는 바이러스만 퇴치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하지만 최재천 교수는 코로나19생태적 사건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기후변화로 인간과 야생동물의 공간이 겹치면서 전염병의 창궐이 잦아지고 있다는 경고다. 문제의 근원이 이렇다면 현대문명과 개개인의 삶이 바뀌지 않는 한 재앙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 팬데믹의 뿌리가 생태위기라면 생태위기를 초래한 근본은 세계관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과 문명은 각자의 마음이 투영되어 구축된 인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위기의 뿌리가 마음이라면 그 마음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근원적 해법이 될 것이다. 유마거사는 마음이 맑아야 국토가 맑다고 했다. 바이러스의 근원적 퇴치를 위해서는 생태적 안정이 필요하고, 생태적 안정을 위해서는 삶과 문명의 전환이 필요한데 그 단초가 바로 가치관의 전환이다. 마음치료를 통해 근원적 해법을 추구하는 처방은 불교의 사상과 전통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존재의 연기성과 만생명의 아버지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실체로 믿으며 욕망의 주체가 되어 대상을 소비한다. 하지만 붓다는 모든 존재는 독자적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가르쳤다. 나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땅···바람[地水火風] 같은 자연적 요소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 자신은 물론 내가 욕망하는 대상들[我所] 역시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 연기설이다.

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나 아닌 것들의 인연화합으로 존재함으로 나라는 존재는 어떤 실체도 없다[無自性]. 영원한 실체로서의 나는 허구적 이미지[我相]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개체 존재의 무실체성을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한다. 공은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아공(我空)과 욕망의 대상들 역시 실체가 없다는 법공(法空)으로 나눠진다. 나와 대상이 모두 공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나라는 인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주적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다.

나는 무수한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기에 나는 타자들로 인해 비로소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불교는 초월자와 인간이라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모든 존재들과의 수평적 관계에 초점을 둔다. 초월자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하는 존재들에 대한 존중과 자비를 담은 불살생을 제일의 실천으로 삼는데 이것이 불교의 생태적 사유와 전통의 근본이 된다.

지배적 세계관은 인간만이 특별하고 존귀하다고 정의한다. 인간 이외의 생명은 인간의 소용에 따라 쓰이는 도구적 가치를 부여할 뿐이다. 하지만 붓다는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고 설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衆生)은 태란습화로 태어나는 모든 종()의 생명을 포함하며, 경전에서는 생명의 무한한 다양성을 논하고 있다. 그 모든 생명은 모두 중생의 범주에 들어가며, 부처님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의 자비로운 어버이가 된다.

윤회전생설에도 생명평등에 대한 사유가 담겨 있다. 모든 생명은 윤회를 통해 생명의 유형이 전환된다는 것이 윤회전생이다. 생물종이 고정된 실체라면 한 번 인간은 영원한 인간이고, 동물은 영원한 동물이다. 하지만 윤회를 통해 생명의 유형이 바뀐다면 인간이라고 더 우월할 것도, 동물이라고 더 열등할 것도 없다. 모든 생명은 인연 따라 존재하는 일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본성은 평등하다. 여기서 인간만이 특별하다거나 만물을 관장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식의 인간중심주의는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인간과 자연의 불이와 동체대비

전통적 형이상학은 인간과 자연을 다른 차원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와 파괴가 무한대로 허용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인간 자체가 땅···바람으로 구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관계가 된다. 이를 의정불이(依正不二)라고 하는데 신토불이라는 말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사유는 선종에서 특히 강조된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 초목성불(草木成佛)과 무정설법(無情說法)이다. 초목성불이란 풀과 나무 같은 식물도 사람처럼 진리를 깨닫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는 혜충국사에 이르면 무정설법으로 나타난다. 무정(無情)이란 언어나 사유능력이 없는 나무와 돌과 같은 사물을 말하는데, 그와 같은 자연적 존재들도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풀과 나무가 부처가 될 수 있고, 산과 바위가 진리를 말한다면 그들도 마땅히 사람과 같은 도덕적 지위를 얻게 된다. 생명 간의 평등을 넘어 생명과 무생물도 둘이 아니라는 통찰이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를 겸비했다고 하여 양족존(兩足尊)이라고 한다. 이는 지혜와 자비가 분리될 수 없음을 뜻한다.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확신에 빠져 있는 자비는 자신만을 위한 자비, 가족만을 위한 자비, 인간이나 생명만을 위한 자비가 된다. 그런 자비는 다른 생명이나 존재에 대한 배제와 폭력적 양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혜로운 통찰에 근거해야만 자기중심적 연민에서 벗어나 참다운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는 자각,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통찰에 이를 때 자비는 나와 내 가족이라는 작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무한한 넓이로 확장된다. 이렇게 나와 관계없는 생명과 존재로 확장된 자비를 무연자비(無緣慈悲)라고 한다. 나라는 인식에 갇혀 있으면 나와 남은 다르지만 바른 깨달음에 이르면 나와 무관한 타자가 결국은 자신임을 알게 된다. 승조법사는 하늘과 땅이 한 뿌리이고, 일체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고 했다. 이렇게 모든 생명과 존재를 나와 한 몸이라는 깊은 통찰에서 나오는 자비를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한다.

생태위기 시대에서 동체대비는 인간에 의해 파괴된 지구를 되살리는 것이다. 욕망으로 짓밟은 생태계를 살아나게 하고, 소외된 생명과 생명의 고리를 다시 잇는 것이다. 그런 실천의 단초는 소욕지족(少欲知足)으로부터 시작한다. 혜능대사는 욕심을 줄이고 만족을 아는 것은 곧 부처님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욕심을 줄이고, 소비를 절제하고 검박하게 사는 것은 개인의 삶을 넘어 지구와 생명을 살리는 자비가 됨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섬기는 실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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