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험한데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여기까지 만나러 왔어요~”
지난 연말에 이웃에 연탄 7백여 장을 기부한 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북하면 성암리 명치마을. 산 아래 작은 마을은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아 지붕 위, 골목 곳곳이 하얀 빛이었다. 도로까지 마중을 나온 김광순 씨를 따라 그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광주에서 식당을 오래 했어요. 늘 ‘언젠간 시골로 가서 산 아래 고가(古家)를 쓸만하게 고쳐 살아야지’ 하는 소망이 있었는데, 결국 6년 전 몸이 안 좋아져서 생각보다 일찍 오게 되었네요”라고 말하는 김 씨의 눈빛이 아련해진다. 그때가 떠올랐을까.
명치 마을은 김광순 씨 여동생의 시댁이 있는 마을. 여동생으로부터 지금 사는 집을 소개받아 조금씩 본인의 스타일로 고쳐가며 살고 있다고 했다.
원래 방 하나는 연탄으로 난방을 했는데, 얼마 전 마을에 공동 LPG 가스가 들어오면서 가지고 있던 연탄을 필요한 이웃에 나눔 하기로 한 것. 본인은 별 것 아니라고 하지만, 되팔 수도 있는 상황에서 면사무소를 찾아가 문의를 하고, 혼자 힘으로는 어려워 북하면 복지기동대의 도움을 받아 꼭 필요한 이웃에 전달되었으니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봉사와 나눔이 일상인 김 씨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장성에 연고가 없는 김 씨가 북하면 여성자원봉사회 회원으로서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을 하는가 하면, 솜씨 좋은 식당 사장님 경험을 발휘해 회관서 어르신들 식사를 책임지는 명치 마을 부녀회 총무로서 어느새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웃 할머니 마당에 쌓인 수십 년 된 연탄재며 쓰레기를 치워드리고, 동네 앞에 미니 정원을 꾸몄더니 지금은 작은 쓰레기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명치마을 부녀회는 마을 어르신 생신 때 회관서 미역국을 끓여 간단한 생신상을 차려 드리는데 ‘자식보다 낫다’는 칭찬을 듣기도 한다.
김 씨는 “처음에는 5시만 되도 마을 길에서 사람을 만나기 어렵고, 같이 운동하거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어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런데 반갑게 인사하면서 먼저 다가가니 언젠가부터 모두 친언니, 친이모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셨어요. 이젠 저도 장성사람 다 됐지요, 뭐”라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김 씨가 식사 담당이 되고 나서 마을회관의 식사 문화가 눈에 띄게 바뀌었다. △개인 식기 사용하기 △앞접시 사용하기 △음식 먹을 만큼만 덜어 먹고, 재활용하지 않기 △일회용품 사용하지 않기 등이다.
김 씨는 “접시에 차고 넘치게 음식을 담아야 복이 오고, 정도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오신 어르신들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접시에 반찬을 조금씩 담아드리면 ‘이걸 먹으라고 주는 거냐’며 화도 내시고 서운해하셨는데 ‘드시고 부족하시면 얼마든지 더 드릴게요’라고 말씀드리고 지켜보고 있다가 반찬이 부족한 것 같으면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더 드리고 했더니 어느 땐가부터 적응하시더라고요”라며 “일회용품을 안 쓰면 그만큼 설거짓거리가 많아지지만, 제가 조금만 부지런하면 회관 운영비도 아끼고, 환경도 살리고, 어르신들 건강에도 도움이 되니 일 석 삼조지요”라고 자랑했다. 내 부모처럼 위해드린 덕분에 마을 어르신들이 “회관 밥 5년만 더 해”라고 하셔서 요즘 고민 중이란다.
귀농·귀촌인의 숫자보다, 그들이 장성에 뿌리를 내리고 이웃들과 더불어 재미나고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김광순 씨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그리고 봉사와 나눔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 중 일부를 더 필요한 사람과 나누면 되는 거라고.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와 인사를 나누던 김광순 씨는 “회관 냉장고에 생선이 좀 있는데, 무 넣고 자작하게 지져서 어르신들 댁에 가져다드리면 추운 날 맛있게 드시겠다”며 ‘음식 배달 계획’을 세웠다. 참 부지런한 사람이다. 김 씨가 눈 쌓인 명치 마을에 온기를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