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수암’서 학술자문회의 좌담회 열려
‘석수암’서 학술자문회의 좌담회 열려
  • 이미선 기자
  • 승인 2020.06.2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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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암 변이중 선생이 남긴 시 속, 석수암 기록 남아
문화재 지정가치 조사 중 건물지, 집수시설, 명문 등 다수 파악

장성군은 예산 6천만 원을 들여 황룡면 관동리 수연산 능선에 잠들어 있는 석수암을 포함한 지역 내 비지정 문화유산 3개소에 대해 지역 역사유산 가치를 재조명하고 역사 가치가 높은 유산을 등록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도록 ()호남문화재연구원을 통해 학술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진입로와 축대시설

호남문화재연구원의 현재까지 조사결과 자료에 따르면 석수암을 출입하는 진입로는 2지점으로 파악했다.

진입로1’은 건물지2의 동쪽을 따라 자리하지만 주로 건물지1로 진입하는 통로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진입로1의 양쪽으로는 할석을 이용하여 축대를 쌓았거나 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또한 건물지1의 진입부쪽에는 계단을 마련하였는데 판석형할석을 이용하여 계단을 넓은 간격으로 시설하였다. 또한 동쪽부분으로는 암반이 돌출된 부분이 있는데 산 아래쪽과 주변을 조망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진입로2’는 사역의 북동쪽에서 확인되는데 외부에서 석수암으로 들어오는 진입로이기도 하지만 저장시설을 이용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축대시설은 여러 지점에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됐는데 사역이 자리한 지형이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시설이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특히 석수암의 주건물지인 건물지1의 동쪽하단부는 대규모의 축대시설이 확인됐다. 축대의 중앙부분에는 석재가 길게 뻗어져 있어서 배수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여러 지점에서 다양한 용도의 축대를 쌓은 것으로 확인했다.

암벽에 새겨진 명문

석수암을 알리는 초입에 1지점(명문1), 건물 뒤편에 4지점(명문2~5)이 남아있다.

명문1’은 수연산의 중턱에 위치하는 석수암의 입구에 해당되는 지점에서 확인된다. 바위의 왼편 중앙부에서 隨緣洞門(수연동문)’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명문2’는 건물지1의 축대 뒤편의 암벽면에서 확인됐다. ‘同遊錄 金必煥 金後燦 奇重鎭 咸豊三年癸丑八月日(동유록 김필환 김후찬 기중진 함풍삼년계축팔월일)’ 이 새겨져 있다. 함풍3년은 서기 1853년이며 이는 조선 철종 4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조선 말기 의병장 정운경이 의병항쟁에 관하여 쓴 동유록에 이름을 새긴 세 사람은 이곳을 다녀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문3’은 명문2와 동일한 암벽의 오른편에서 확인됐다. 縱書(종서(세로쓰기))觀世音菩薩 竹庵 庾炳鑽 辛未夏(관세음보살 죽암 유병찬 신미하)’라고 새겨져 있다.

표면이 가장 좋은 암벽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 명문 중 가장 먼저 새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연호가 없어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다. 또한 죽암(竹庵)이 이 사지의 명칭인지 유병찬(庾炳鑽)의 호()인지의 여부도 불분명하다.

명문4’는 명문2,3의 오른쪽 석벽에서 확인됐다. 縱書(종서(세로쓰기))金肯鉉, 辛恒文 金泳奎 二千九百五十午年 丁卯七月 日(김긍현, 신항문 김영규 이천구백오십오년 정묘칠월 일)’이라고 새겨져 있다. 불기 2955년은 서기 1927년에 해당된다.

명문5’는 건물 뒤편의 우물 주변의 석벽에서 확인됐다. 縱書(종서(세로쓰기))金永允 書 藥泉 庾氏 效(김영윤 서 약천 유씨 효)’라고 새겨져 있다. 藥泉(약천)이 다른 글자들에 비해 크고 뚜렷하게 새겨져 있어 약수로 사용되었으리라 파악하고 있다.

여러 명문들에서 확인되는 연호로 보아 조선시대 말(1853(명문2))과 일제 강점기(1927(명문4))까지도 석수암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추측하고 있다.

좌담회, 석수암에 대한 새로운 추측 및 기록들

지난 8일에는 관동리 석수암지에 대한 학술자문회의가 좌담회 형식으로 이영덕 ()호남문화재연구원 원장, 홍영기 전 순천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이계표 ()호남불교문화원장, 은화수 국립나주박물관 관장, ()호남문화재 책임연구원, 장성군 학예연구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관동리 석수암지에서 진행됐다.

좌담회의 논의사항으로는 석수암지 현지조사 결과 검토, 석수암지 연혁, 호남 의병사에서 석수암지의 위치와 역사적 가치 도출, 석수암지 향후 조사·연구방향모색 등을 논의하기 위해 이뤄졌다.

은화수 국립나주박물관 관장은 “17년 전 석수암지를 조사했을 때 실질적으로 항일유적까지는 잘 몰랐고 생각보다 유적이 많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이 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관동리에 있는 육군부대의 인도를 받아 올라왔었고 약칭 정도만 하고 말았는데 호남창의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자리인지 이번에 조사해줌으로써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석수암지가 국방부 땅이기 때문에 매일은 올 수는 없으니 한 달에 한 번 정도 개방해서 군부대의 인도하에 올 수 있는 날을 정해야만 관리가 된다고 말했다.

이영덕 원장은 석수암이란 존재가 이쪽 지역에서 부각됐던 시점이 19세기 후반쯤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다. 명문도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시기였던 것 같다. 그쯤에 석수암의 역사성들은 한말 의병과 관련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어 금호리에 성재 기삼연 선생의 묘소가 이장됐다. 이장된 장소이지만 기삼연 선생의 묘소와 함께 연계를 시킨다면 호국 유족의 교육장소로 활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석수암 좌담회(좌측부터 이계표 원장, 홍영기 교수, 은화수 관장, 이영덕 원장)

홍영기 전 순천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는 기록에 따르면 양력 1018일에 기삼연의 부하 30명이 그 당시 장성군 서의면 석수암에 운집했다는 내용과 1031일에 다시 석수암에 모였다는 내용이 일본측 기록에 남아있다. 고창읍성 점령이 111일에 이뤄지는데 그 전날 석수암에 모였다가 다음날 고창으로 넘어가 점령한 것으로 아마도 2~3일 사이에 모두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석수암지에 모인 의병들은 처음엔 30명이었으나 여러 의병부대가 모여 1031일에는 400여 명이 모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 석수암지에 400여 명이 모여서 고창읍성을 점령에 나섰던 주력 의병들 집결지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전라도의 전체 후기의병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병은 호남창의회맹소고 의병을 본격화하는데 가장 기여했던 의병, 의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의병들이 활용했던 다른 지역의 사찰들과도 한 번쯤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석수암지는 역사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한번쯤은 꼭 와보고 싶었다. 이번에 이곳을 와본 것에 감격스럽기도 하고 감개무량하다고 전했다.

이계표 ()호남불교문화원장은 석수암지를 걸어 올라가면서 우리가 지금 역사적인 의병의 길을 걷고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좌담회에서는 석수암이라고 하는 절이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관련된 문헌기록은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 중기 지리지에 나올 정도로 뚜렷한 존재감은 가지고 있었다.

석수암은 지역의 유학자들이 들려 시회, 공부, 유희 등을 하고 스님들이 거주하였던 일반적인 사설암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지역 망암 변이중 선생이 남긴 시 중에 석수암이라는 기록이 있다. 변이중 선생은 1611년 광해군 3년에 돌아가셨다. 그러니 변이중 선생의 시는 1611년 이전에 지어졌을 것이고 임진왜란 이전일수도, 직후일수도 있으나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이전에 석수암으로 뚜렷한 존재가 있었고 호남창의회맹소로 사용되기까지 이어진 것 같다. 따를 수(), 인연 연() 수연산 석수암은 1900년대 초반 한일의병이 활동의 근거지, 집결지 역할을 한 것으로 예상된다. 사찰은 의병활동 장소로 많이 이용됐었다고 말했다.

이어 항일의병, 독립운동 등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가 항일유적지로서의 가장 밀도 있는 논의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영덕 원장은 좌담회를 통해 석수암에 대한 새로운 기록들이 찾아질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고 말했다.

()호남문화재연구원은 현재 1차 현지조사 결과를 통해 고고학적 현황을 파악하고 고증을 위한 문헌자료를 검토 중이다. 추후 자연·인문환경의 검토와 문화재 보존정비 및 활용 기본계획 수립을 통해 문화재 지정신청을 위한 자료작성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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