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형수님 추억
고마운 형수님 추억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20.06.08 23:52
  • 호수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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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냉철하고 이지적인 학자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따뜻한 인정이 서려 있기 마련입니다. 다산처럼 비판적이고 굳은 이성(理性)의 소유자였으나, 그의 많은 글을 보면 인간미가 철철 흐르는 대목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그가 귀양 살던 오랜 기간에 고향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엄한 스승의 모습도 많이 보이지만, 편지의 내면에 흐르는 다산의 인정미와 자식에 대한 따뜻한 애정은 숨길 수 없이 많이 드러나 있습니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젊은 큰 형수의 돌봄으로 유년시절을 보낸 다산은 큰형수의 무덤에 넣은 ‘묘지명(墓誌銘)’이라는 글을 통해, 형수의 인품과 행실을 찬양하는 글을 남겨, 형수의 은혜에 보답하는 정성을 보였습니다.

“형수의 성씨는 이씨이다. 본관은 경주, 시조는 신라 명신 이알평이다. 뒤에 이정형(李廷馨)이 있었는데,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할아버지 달(鐽)이라는 분이 무관(武官)으로 전라병마절도사에 이르고 아버지 이보만과 어머니 한씨 사이에서 1750년 3월 24일 태어났다.”라고 설명하고, 15세에 자신의 큰형 정약현의 아내로 들어와 아버지가 예천군수로 계실 때, 그곳에 가서 시아버지를 모시다가 돌림병으로 1780년 4월 15일에 사망하니 겨우 31세로 요절했다고 썼습니다. 연대로 계산해보면, 1764년에 시집왔으니, 그때 다산은 3세(1762년생)이고, 다산의 어머니가 9세인 1770년 세상을 떠났으니 아홉 살에서 12세까지는 형수의 돌봄 아래서 다산은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도 관직에서 물러나시자 집안 살림은 더욱 쓸쓸하여 제수(祭需)나 닭고기, 곡식 등 음식물 마련하기도 어려웠다. 형수가 혼자서 집안 살림을 꾸려갔다. 그래서 팔찌와 비녀 등의 재물을 모두 팔아 쓰고, 심지어는 솜을 넣지 않은 바지로 겨울을 보냈으나 집안 식구들은 알지도 못했다. 지금이야 형편이 조금 피어 끼니는 이어갈 만한데 형수는 미처 누리지도 못했으니 슬픈 일이다.”라는 애처로운 말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 없는 시동생을 돌봐준 형수의 은혜를 미려하고 뛰어난 글로 찬양했습니다.

 

「구수공인이씨묘지명」 丘嫂恭人李氏墓誌銘

시어머니 섬기기 쉽지 않나니 事姑未易

계모인 시어머니 더욱 어렵네 姑而繼母則難

시아버지 섬기기 쉽지 않나니 事舅未易

아내 없는 시아버지 더욱 어렵네 舅而無妻則難

시동생 돌보기 쉽지 않나니 遇叔未易

어머니 없는 시동생 더욱 어렵네 叔而無母則難

이런 어려운 일을 유감없이 잘했으니 能於是無憾

이런 게 형수의 아량이었네 是惟丘嫂之寬

 

다산의 글솜씨는 역시 탁월합니다. 소생도 없이 나이 겨우 31살에 세상을 떠난 형수의 일생을 이렇게 짤막한 글에서, 이렇게 멋지고 좋은 표현으로 글을 지을 수 있었던 다산의 문장력, 뛰어난 솜씨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명문 경주 이씨 집안으로, 남동생 이벽(李檗)은 한국 천주교회의 창시자였고, 또 다른 아우 이격(李格)은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을 지낸 고관이기도 했습니다.

이름 없는 여인 한 사람이 시동생을 잘 만났고, 잘 돌봐준 은공으로 이렇게 멋진 일대기로 세상에서 오래도록 전해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옳게 살아간 삶은 언젠가는 빛을 본다는 교훈을 이런 데서 얻을 수 있습니다. (졸역 『다산산문선』에 원문이 있습니다.)

 

-글쓴이: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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