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대 노부부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리길수 옹, 정영자 여사'
90대 노부부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리길수 옹, 정영자 여사'
  • 이미선 기자
  • 승인 2020.05.25 11:53
  • 호수 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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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불편한 아내,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함께 할 것

 

흑백사진 속 앳된 청년과 새색시는 어느새 주름 가득한 노인이 됐다. 마른 고목의 껍질처럼 투박하고 거칠어진 손에는 그들의 인생이 담겼다. 해가 지나면 70, 강산이 일곱 번도 더 바뀌었을 시간을 함께 걸어온 부부가 있다.

리길수(92) , 정영자(87) 여사이다. 이 부부의 나이를 합친 숫자가 백칠십 하고도 아홉이다.

6.25 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고려대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리 옹은 이웃 어르신들의 중매로 정 여사를 만나 24살의 나이에 결혼 후 슬하에 42녀의 남매를 뒀다.

19살 앳된 색시였던 정 여사도 어느새 아흔을 바라보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모든 중심에는 정 여사

70여 년 동안 정당 생활을 해왔던 리 옹은 가정에는 무관심한 가장이었다.

정당 생활을 하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리 옹을 대신해 정 여사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과일 등을 팔며 생계를 꾸렸다.

그렇게 고생을 하며 굽이굽이 몇십 년 간을 살아오던 정 여사는 4년 전 겨울, 미끄러져 골반 아래 다리뼈가 골절이 됐다. 이후 나이 때문인지 뼈가 제대로 붙지 않아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걷기 힘든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런 정 여사를 위해 리 옹은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자신이 보살피기로 다짐했다.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음식, 설거지 등 집안일을 도맡아서 하게 됐고 황룡장이 열리는 날이면 정 여사가 좋아하는 미나리를 사서 정 여사의 식성에 맞춰 반찬을 만든다. 어느덧 리 옹은 요리사가 다 되어버렸다.

리 옹은 지금까지 4년째 집안일을 하고 있지만 아내는 70여 년 동안 이 힘든 일을 혼자 했다고 생각하니 참...”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정 여사를 병원에 모시면 더욱 편하지 않냐는 질문에 리 옹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대답한다.

병원에서 아무리 지극 정성을 다해 보살핀다고 하여도 많은 인원을 꼼꼼하게 보살피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꼭 있을 터,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보살필 것이다고 말한다.

 

리 옹의 하루 일과는 정 여사로 시작되어 정 여사로 끝이 난다.

리 옹은 정 여사를 휠체어에 태워 밖에 나가 산책하며 바람 쐬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나이가 들어 밖에 나가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 리 옹은 조금 더 젊었을 때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웃들은 부부의 이런 모습들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말한다. 지난 4월 국회의원 선거 때는 정 여사를 휠체어에 태워 투표까지 함께 하고 왔다고 한다.

 

그래도 이 사람이 먼저 떠났으면

리 옹은 요새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리 옹이 먼저 가버리면 누가 정 여사를 보살피나 걱정이 가득하다. 자식들에게 맡기기도 미안스럽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떠나면 아픈 아내가 혼자남을 걸 생각하면 잠이 안 와요. 한 날 한시에 함께 이 세상을 떠났으면 하지만 그게 뜻대로 안 된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도 저보다 아내가 먼저 떠났으면 해요. 차라리 제가 힘들고 외로운 게 나으니까요

할 수만 있다면 두 손 꼭 잡고 함께 가고 싶은 것이 이 두 부부의 간절한 바람이다.

정 여사는 내가 조금이라도 걷고 웃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영감 덕이라고 말한다.

리 옹은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남은 생이라도 행복하게 아내를 챙겨주고 싶고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말한다.

 

리길수 옹은 자신이 좋아한다는 나옹선사청산은 나를 보고라는 시를 읊어줬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푸른 청춘일 때 만나 반 백년 이상을 함께하다 보니 어느덧 87세와 92세 노인이 됐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내려앉아 얼굴엔 주름이 지고 윤기가 흐르던 머리카락은 파뿌리처럼 하얗게 셌지만 부부는 살아온 날의 절반 이상을 함께 했음에도 여전히 서로 다정하고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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