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는 제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스승이 있다.
그는 40여 년간 교직생활을 한 김영환(82) 선생님, 1966년도에 영광군에서 첫 교직 생활을 시작해 70년도에 장성군으로 발령받아 장성여중, 삼서중, 황룡중에서 교직 생활을 했다.
김 선생은 공무원으로서 직무에 힘을 다하여 부지런히 노력하여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녹조근정훈장을 수여했고 서울애향운동 본부에서 오랫동안 고향을 지키고 있는 지역민에게 수여하는 ‘고향 지킴이’ 상패를 받기도 했다. 김 선생이 태어난 곳이자 5대째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리가 잘되어있는 마당 사이로 호랑이 선생님이었다는 인상과는 거리가 먼 인자한 외모의 선생님이 반겨주셨다.
사회인으로 경쟁을 하자! 한마디에 힘입어
40여 년간의 교직생활을 하며 기억에 남는 제자들이 있냐고 물었다.
김 선생은 많은 제자들이 떠오르지만 그중 두 명의 제자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줬다.
“오래전 겨울 저녁, 누군가 집을 찾아와서 보니 황룡중학교를 졸업한 제자였어요. 그 친구는 당시 가난한 생활에서도 저를 만나러 온다고 소주 한 병과 땅콩이 든 과자 한 봉지를 들고 찾아와서는 큰절을 하며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게 됐다더군요. 조금이라도 용기를 주기 위해 그 친구에게 ‘이제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를 떠나서 너도 대학생, 사회인이 되었으니 서로 같은 사회인으로서 누가 먼저 원하는 목표에 달성하는지 경쟁을 하자’고 말했어요. 그 말은 제가 교감, 교장이 되느냐, 네가 먼저 성공을 하느냐 경쟁을 하자는 것이었죠. 이후 같은 해에 저는 교감으로 승진하였고, 제자는 사법 고시에 합격을 하였습니다. 무승부가 된 셈이죠.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 친구의 집에서는 잔치가 열렸고 그 친구의 가족들, 친인척들은 저를 보자 박수갈채를 보내더라고요. ‘어째서 저에게 박수갈채를 보내시느냐’고 여쭤보니 대답하기를 겨울 저녁 저를 찾아왔던 그 친구가 제가 던진 ‘누가 먼저 원하는 목표에 달성하는지 경쟁을 하자’라는 말에 힘을 얻어 열심히 달려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그때 용기를 주시고 힘을 주셨던 분이 바로 김영환 선생님이시다’고 했다더군요. 오로지 그 친구가 이뤄낸 결과물이고 성공해서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데 한 것도 없는 제가 박수갈채를 받으니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 친구는 전주, 광주 등 판사까지 하고 현재는 변호사를 하며 멋지게 성공한 저의 제자 중 한 명입니다”
호랑이 선생님과 잘 자라 준 첫 제자
또 한 명의 제자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광군에서 처음 맡은 반, 처음 만난 제자였던 그 친구는 아주 수줍음이 많은 내성적인 남학생이었죠.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좋고 저 나름대로 기대가 생겼던 것 같아요. 저 친구를 성공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줘야겠구나 다짐하고 웅변도 시키고 혼내기도 많이 혼냈습니다. 그 친구가 번듯하게 잘 자라 현재는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교육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랍니다. 또 제가 교직에 있을 때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불렸는데 제가 담임을 맡았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50년이 넘는 세월의 이야기가 담긴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을 발간했더라고요”
김 선생은 책상 한쪽 잘 보이는 곳에 보관해둔 책을 꺼내 보여주었다. 표지에는 젊은 시절의 김 선생과 제자의 사진이 스승과 제자의 오랜 시간을 알려주듯 빛바랜 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책의 앞장을 펴자 “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시어 고향의 전원생활을 즐기고 계시는 그가 있어서 내 마음 한쪽이 든든하다. 중요한 일을 놓고 상의할 수 있는 그가 있어 나는 행복하다. 초등학교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로 만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인생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된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머리말을 써놓았다. 몇 글자에서 스승의 대한 존경심이 묻어나왔다.
김 선생은 대화를 하는 내내 성공해서 잘살고 있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하며 내가 혼내기만 했던 것 같은데 잘 자라준 제자들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제는 제자이자 든든한 고향 후배들
김 선생은 황룡중학교 제자들이 더욱 애틋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황룡은 나의 고향이자 현재도 살아가고 있고 교직 생활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근무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란다.
“황룡중학교 제자들이 동창회를 한다고 초청을 받아 갔었는데 아니 이놈들이 돌아가면서 똑같은 소리를 한마디씩 하더라고요. 모두 하나같이 저한테 맞았던 장소만 다르다며 지금은 다 커서 하는 이야기지만 뒤에서 선생님 욕도 많이 했다고 그제야 이야기를 하더군요. 지금은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제자이며 든든한 고향 후배죠”
황룡중학교 동문회가 시작되면서부터는 항상 김 선생을 초청한다고 한다. 더듬더듬 서랍 속 봉투를 열어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지금까지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열린 총동문회, 동창회 등에서 말했던 격려사, 축사를 기록해 놓은 종이를 모두 간직하고 있었다.
김 선생은 격려사, 축사를 작성할 때 한 글자 한 글자에 의미 있는 내용, 격려해주고 축하해줄 수 있는 내용들을 몇 날 며칠을 고뇌하며 글을 썼다가 지웠다가를 수십 번 반복해 작성해냈다고 한다.
이야기를 마치기 전 황룡중학교 졸업앨범을 펼쳐보았다. 졸업앨범 속 김영환 선생님의 사진을 보니 예리한 눈빛이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렸을만 했다.
김 선생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안부를 묻고 변함없이 찾아주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고 한다. 다시 돌아가 교직 생활을 한다면 그때보다 조금 더 다정한 선생님,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한다. 여든이 넘은 나이를 먹고 잘한 것 중 하나가 내 고향 장성에서 교직 생활을 한 것이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나의 제자들을 돈으로 따진다면 억만금을 얻은 것과 같다며 웃어 보였다.
퇴직을 하였어도 한 번 선생님은 영원한 선생님이다. 김영환 선생님은 많은 제자들에게 한줄기의 빛이 되기도, 정신적인 지주가 되기도, 또한 길잡이 역할을 했을 것이다.
김 선생은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현재 맡은 일,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돌아오지 않은 오늘을 후회 없이 살아라. 아차! 하고 후회할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꼭 명심하거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