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기억과 밝은 미래가 함께하는 '베트남과 한국'
아픈 기억과 밝은 미래가 함께하는 '베트남과 한국'
  • 변동빈 기자
  • 승인 2020.01.13 11:01
  • 호수 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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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용으로 꿈틀대는 베트남의 저력
호치민
호치민

<우리나라와 베트남>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다문화 인구동태에 따르면 다문화 가정 출생아수는 18079명이고,

어머니가 베트남 출신인 경우가 35.6%로 가장 높아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 출신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643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중국(21%)에 이어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과거 중국이 가장 높은 비율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결혼이 높게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아버지의 국적은 중국이 7.6%로 가장 높고, 미국과 베트남이 각각 5.5%2.9%로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관계는 1956년 대한민국과 베트남 공화국(월남)의 수교로 시작되었으며, 1975년 사이공 함락(남베트남)으로 단교하였으나, 1992년 대한민국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통일 베트남)이 수교하였다.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베트남 공화국(월남)은 한국과, 베트남 민주 공화국(월맹)은 북한과 단독으로 수교하고 있었으나, 사이공 함락 이후에는 북한과의 수교만 유지되었다.

베트남과 우리나라는 오래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과 100년 전에는 각각 프랑스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경험했다는 점 그리고 타의에 의해 남북이 갈라져 동족끼리 전쟁을 치렀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많다.

우리나라는 1950년부터 3년 동안 전쟁을 치르고 휴전 상태에 있으며 베트남은 무려 10년 이상 전쟁을 치러 통일 베트남이 된 것이 다를 뿐이다.

 

<화산 이씨와 베트남>

 

우리나라 베트남 다문화 가정의 원조는 1226년 베트남 최초의 통일왕조인 리왕조가 몰락하면서 고려로 망명한 이용상이다.

그는 베트남 제 6대 황제 영종의 7남으로 태어났는데 조카인 혜종이 제 8대 황제에 오른 뒤 왕조의 외척인 진수도가 혜종의 딸을 임금에 앉힌 뒤 남편에게 왕위를 넘기게 하고 대규모 숙청을 시작하였다.

진수도는 혜종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씨 종친들과 일가족을 살육한 것은 물론 이씨 가문 후손들을 찾아 무자비한 살육을 멈추지 않았다.

1226년 이용상은 일족과 부하들을 데리고 바다로 도망쳐 남송과 대만, 금나라, 몽골 등을 거쳐 지금의 황해도 옹진군 화산포에 이르렀다. 베트남 왕자가 표류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려 조정에선 크게 환영하며 이용상이 고려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줬고, 화산 이씨라는 성씨도 조정이 하사했다고 한다.

화산군 이용상은 원나라 침입 때 지역 주민들과 함께, 몽고군과 싸워 전과를 올렸으며,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용상을 시조로 받들어, 본관을 화산으로 삼았다.

베트남에서는 매년 음력 315덴도축제라고 하는 리 왕조 창건 기념축제가 열리는데 이 축제에는 한국에 거주하는 화산이씨 후손들이 초청받아 참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경북 영주시 장수면 성곡리에 화산 이씨 종택(이당고택)과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에 충효당이 있는데 모두 화산 이씨와 관련된 장소들이다. 베트남에서 신임 대사가 부임하면 대부분 이 곳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충효당은 이용상의 13세손인 이장발(1574~92)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9세의 어린 나이로 전장에 달려가 문경새재에서 혈전 끝에 사망하여 그의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이장발은 죽기 전에 백년 사직을 구할 계획을 갖고/6월에 갑옷을 입었네/나라를 위한 근심에 몸은 비록 헛되이 죽고 말지만/홀로 계신 어머니 못 잊어 혼백만 외로이 돌아가네라는 시를 남겼다고 전한다. 화산이씨는 약 1300여명이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으며 서울과 인천 그리고 경북에 살고 있다.

 

전쟁박물관
전쟁박물관

<베트남 전쟁과 한국>

1945년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독립하였으며,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월맹)과 베트남국(월남)으로 나뉘었다. 베트남국은 응오딘지엠의 정변으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진다. 베트남 공화국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미국과 프랑스 제4공화국에 의해 자유 진영에 편입되었으며, 대한민국은 1956년에 정식으로 베트남 공화국과 수교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남베트남과 자유 진영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기도 하였으며, 여전히 고엽제 피해 등 후유증을 안고 있다.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의무중대 등 후방지원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가 파병되었고, 1966년에는 "브라운 각서"의 조인으로 백마부대가 추가 파병되어 베트남전 참전 8년간 총 312853(최대 5만 명)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총알맞은 카메라
총알맞은 카메라

 

외화획득 등 많은 경제적 이익과 전투 경험을 얻은 반면, 한국군 32만명이 파병되어 5천명이 전사하고 고엽제(2만여 명의 피해) 및 화공약품 후유증으로 귀국 후 많은 병사자가 발생하였다. 한편으로 파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1966126, 131명 사망) 등이 있었다.

 

 

<양국의 수교와 친교 그리고 우의>

19921222일에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현재 하노이에 상주 대사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호찌민 시에는 총영사관이 설치되어 있다. 1993년 포 반 키엣 수상이 방한하였으며, 1996년에는 김영삼 대통령, 1998년 김대중 대통령,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였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였을 때 베트남 전쟁에 대한 유감발언을 하였으며 20018월에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의 방한 방문에서는 "우리는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공식 사과하였다.

1969년 11월 20일자 신문
1969년 11월 20일자 신문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1010일 오후 한·베트남 정상회담에 이어 판 반 카이 총리와 농 득 마잉 당서기장을 잇따라 만나 경제협력 증진과 양국관계에 대해 환담했다. 노 대통령과 카이 총리는 이날 베트남 투자여건 개선 자원, 에너지, 정보통신 분야의 협력 등 경제협력을 증대하는 방안에 대해 주로 협의했다.

 

 

 

<베트남의 영원한 아버지 호치민>

북베트남(월맹)은 남베트남(월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을 함락한 뒤 사이공시의 이름을 호치민으로 바꾸었다. 호치민은 1890년 베트남 중부 호앙쭈라는 작은 도시에서 농민 출신인 가난한 아버지 아래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호치민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고, 21세 되던 1911

프랑스 증기선의 요리사가 되어 3년 이상 세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다.

1914년부터 3년 동안은 런던에서 생활하였고, 1919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파리에 정착하여 정원사, 청소부로 일하며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프랑스 공산당이 창립되자 입당하여 활동하였고, 1921년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정책의 악행을 고발하는 기관지 르 파리아>(추방자라는 뜻)를 편집·발행하였다.

호치민청사
호치민청사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대회에 출석, 이곳에서 약 2년간 머물며 공산당 혁명사상을 익혔다. 그 후 중국을 근거지로 베트남 혁명청년 동지회를 결성, 이곳에서 훈련받은 베트남인들을 인도차이나 지하조직으로 내보냈으며 기관지청년을 발행하며 조직을 키워 나갔다.

홍콩과 모스크바 중국을 왕래하며 공산당 조직과 함께하던 그는 1941년 베트남 잠입에 성공하여 프랑스 지배를 받던 베트남의 해방을 위해 베트남 독립동맹(월맹)을 결성하며 이름을 호치민으로 개명하였다.

19452월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 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으나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 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1960년 베트남의 남북 전쟁이 시작되었고, 1969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호치민은 일생 동안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고, 재산도 축적하지 않았으며 검소하고, 청빈한 삶으로 일관하였다. 그가 사랑한 것은 오로지 베트남 인민들이었고, 그의 철학과 가치는 베트남 정치에 가장 근본적인 기초가 되었다. 그는 유언에서 자신의 장례를 소박하게 치를 것과 화장하여 베트남 조국에 뿌려달라고 하였지만 베트남 인민들은 그의 유언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의 유해는 수도인 하노이에 호치민 묘를 조성하여 성역처럼 여기고 있다.

 

<아시아의 용으로 꿈틀대는 베트남>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에 비해 10분의 1에 불과한 베트남은 이동통신과 전자금융서비스 등에서 결코 우리나라에 뒤지지 않는다. 휴대전화를 이용한 모바일 뱅킹도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가고 있으며 일부 산간오지를 제외하고는 어디서나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다.

베트남의 휴대전화(스마트폰) 보급률은 60% 내외이지만 전자망을 이용한 물품 구매율은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앞서고 있다.

베트남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베트남 최대 민간기업인 빈그룹이 지난해 추진한 사업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빈그룹은 지난해 12월 전국 2600개의 슈퍼마켓 등을 식품 대기업과 합병하였다. 베트남의 온라인 쇼핑 매출은 매년 30%씩 증가하고 있어 빈그룹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연간 수억 달러 이상의 적자에 허덕였다.

베트남 국민들 가운데 통장을 갖고 있는 비율은 60% 내외에 불과한데도 온라인 혹은 모바일로 이뤄지는 전자결제, P2P 플랫폼을 활용하는 금융 서비스 등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금융기관인 미래에셋이나 우리은행 등에서도 베트남에 진출하여 영업망을 확충하고 있다. 베트남은 미래산업인 금융과 전자 그리고 인공지능에 대한 투자가 이어지고 있고 글로벌기업의 투자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나 법적인 미비 등으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반면 베트남은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베트남은 앞으로 10년 내에 베트남 경제를 한국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고, 그 목표는 점차 실현 가능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베트남의 경제성장률은 매년 7% 이상을 상회하고 있고, 이러한 성장률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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