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의 건립배경과 위상
필암서원의 건립배경과 위상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9.07.22 17:49
  • 호수 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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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의 역사와 건물의 배치
확연루
확연루

 

2. 필암서원의 역사와 건물의 배치

필암서원의 건립

필암서원은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종향된 하서 김인후선생과 그의 문인이며 사위인 고암 양자징을 모신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서 깊은 건축물과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필암서원은 선생의 사후 30년 되던 1590년 전라도 관찰서였던 윤두수의 발의로 정철 등 서인계 호남의 사람들이 협력하여 건립하였다. 필암서원은 대개 문인인 금강 기효간, 호암 변성온, 망암 변이중 등 호남 선비의 발의로 장성읍 기산리 남쪽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그런데 1624년 중건 되었을 때 추담 김우급(1574~1643)이 지은 [필암서원중건상량문]에 필암서원을 오음 윤두수(1533~1601)가 처음 발의하고, 정철이 배알하였다고 하였다. 추담은 상량문에서 하서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자질로서 인의를 깊이 실천한 인물로 안자(안연)와 증자(증삼)에 뒤지지 않고, 주자와 정자와도 나란하다고 추앙하였다.

추담은 윤두수가 15976월 관찰사로 부임하여 15886월까지 전라도 지역을 순시하였는데 김인후 선생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곳에 서원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정철 등 호남지역 선비들에게 그 뜻을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서원의 건립이 지방 사림의 협조 없이는 곤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하서 선생의 문인, 손자인 남중, 외손인 양천회, 양천경 기대승의 아들인 기효증 등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김봉곤 전남대 교수)

그런데 1597년 정유재란 때 필암서원이 소실되어 1624년 서원의 복설을 추진하여 옛터인 장성읍 기산리에서 황룡면 필암리 증산동으로 자리를 옮겨 이설하였다.

이 때 추담 김우급이 상량문을 지었고, 1658년 오이익 등이 사액(賜額)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1659[필암]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필암이라는 명칭은 송병선이 쓴 묘정비에 하서선생의 고향인 맥동에 붓처럼 예리한 형상의 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고 하였고, 맥동 입구의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뒷면에 병계 윤봉구(1681~1767)가 쓴 필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662년에는 현종이 어필로 필암이라는 사액을 직접 내렸고, 1668년에는 이조판서 및 양관대제학으로 증직하였고, 1669년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필암서원의 이건과 위상강화

 

필암서원은 1672년 현 소재지인 필암리로 다시 옮겨 짓게 되었다. 1671년 여름 장마에 건물이 물에 잠기는 등 홍수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사액 서원답게 면모를 일신하고 규모도 늘릴 목적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이건에는 하서선생의 후손인 김형지와 외손인 이실지, 박승화, 기정연 등이 주도하였다. 서원의 장의였던 남계 이실지는 서인(西人)의 영수인 필암서원 송준길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이건 문제를 상의하였고, 송준길은 장성부사 김세정에게 협의하라고 하였다. 마침 우암 송시열의 아우 송시도가 신임 장성부사로 임명(1671~1674 재임)되어 필암서원 이건이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때 동춘당 송준길이 [이건고유문]을 짓고, 우암 송시열이 제문인 [이건후봉안하서김선생문]을 지었다. 그리고 청절당, 진덕재, 숭의재의 편액은 송준길이 쓰고, 확연루의 편액은 송시열이 썼다.

확연의 뜻은 정명도의 '확연대공에서 따온 말로 마음이 탁 트여 크게 공평무사하다는 말이며 상량문인 [필암서원해우상량문]은 송암 기정익이 지었다.

필암서원은 서인과 남인의 당파싸움이 한창이던 시기에 중앙의 서인과 노론의 후원을 받아 광주와 전남 지역의 장흥고씨, 행주기씨, 광산김씨, 황주변씨와 함께 노론의 가문들이 서로 연대하고 서인의 사림들이 결집하는 구심역할을 담당하였다.

필암서원의 원장은 송준길을 비롯하여 김원행, 김종수, 심환지 등 당대의 명망가이자 노론계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필암서원은 원장 외에도 원이와 진신장의를 두었는데 원이는 관찰사가 진신장의는 장성 또는 광주 등지의 부사나 군수가 맡았다. 필암서원의 위상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것이다.

1786년에는 선생의 문인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이 추배되었다. 양자징의 서원 추배는 1677년 창평 정유달, 나주 나천추 등이 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다시 1703년 나천형 등이 상소하여 양자징, 변성온, 기효간 등 세 사람을 추배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또한 허락되지 않았다.

1786년 진사 이경집 등 장성 유림들의 소에 의해 양자징의 추배가 허락되었다.

이후 1796년 정조 때에 의해 하서 선생이 문묘에 종향됨에 따라 필암서원은 대현(大賢)서원으로 사회적 위치가 더욱 격상되었다.

 

서원의 건립과 정치적 배경

 

필암서원이 건립되었을 때 호남 지역도 사림의 지배체제가 확고해지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서원의 건립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1560~1590년까지 호남지역 서원 건립현황을 보면 1564년 김굉필을 모신 순천의 옥천서원과 1570년 조광조를 모신 능주의 죽수서원이 건립되었는데 이곳은 그들이 귀양을 와서 사약을 받은 곳이었다.

1577년에는 이항을 모신 태인의 남고서원, 1578년에는 이언적을 모신 전주 화산서원, 1579년에는 기대승을 모신 광주 월봉서원이 건립되었다. 1590년에는 이후백을 모신 강진의 서봉서원과 필암서원이 건립되었다.

옥천서원은 건립되고 4년 뒤인 1568년 옥천이라 사액되었고, 1570년 건립된 죽수서원은 건립되자마자 사액되었다. 사림의 지배체제가 지역에서도 공고하게 되어가고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 장성에서 1585년 향안이 작성되고 향약이 시행되었다는 것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필암서원의 터와 입지환경

 

필암서원은 최초 1590년 장성읍 기산리에 김인후서원으로 창건되었다. 기산리는 선생의 태생지인 맥동과 가깝고, 물이 합수하는 지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필암서원 묘정비에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삼십일 년 만에 문인들이 기산 아래에 나아가 사우를 창립하여 갱장(공경하여 추모함) 강한의 사모를 붙였는데 그 후 증산에 옮겼다고 하였다.

기산 아래에 문인들이 모인 것은 강한이 [시경] 대아편에 나오는 글로 주나라 때 선왕의 좋은 정치와 소호의 공적에 대한 찬사의 글로 양자강 한수 물 합수하는 곳 왕께서 소호에게 분부하시다는 내용의 지형이 강한과 기산리가 흡사한 곳으로 물이 합쳐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필암서원이 첫 번째로 옮겨 지은 곳은 기산리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현재 황룡면 증산마을이다. 필암서원지에 의하면 “1624년 이곳에 필암서원이 이건되었다고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672년 물난리로 증산의 흙다리가 위험해지자 해타리로 이건하였다고 하였다. 해타리는 필암리의 옛 이름이다. 필암서원의 입지 환경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점은 물이 합쳐지는 곳을 선택하였다는 것으로 다리를 건너 서원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필암서원이 증산리로 이건된 뒤 비로소 강당과 사묘를 갖춘 서원이 구축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동춘당 송준길이 쓴 글에 대지가 원래 경사져 있어 안전하지 못하므로 여러 사람들의 뜻이 이건하기를 원하여 옮기려 하였으나 결과가 없었다, 이번 여름에 원우의 모든 방이 비로 인하여 무너지려 한다. 때문에 옛 서원에서 몇 마장 떨어진 추산아래 공사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필암서원의 건물 구성

필암서원의 문루인 확연루는 평지임에도 2층의 누각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필암서원의 확연루는 평지에 적합하지 않은 몇 가지를 갖고 있다. 첫째, 문루의 높이가 낮아 조선시대 선비들이 갓을 쓰고 출입하는데 불편하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도 위치와 처리 방식이 평지에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증산마을에 있던 필암서원이 경사지에 있었기 때문에 경사지에 맞는 누각을 평지에 옮겼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확연루의 편액은 송시열이 썼는데 선생이 확연대공(廓然大公, 마음이 넓게 트여 크게 공평무사함)함을 표현한 것이다.

사당인 우동사는 정면 3, 측면 2칸 규모로 편액은 안규용이 주희의 글자를 모아 만들었으며 [신도비명]하늘의 도움으로 동방에 하서가 종생하였다(天祐我東鍾生)는 구절에서 두 글자를 따왔다.

강당인 청절당은 정면 5, 측면 3칸의 강당으로 편액은 송준길이 썼다. 필암서원이 사액되기 전에 건립되었다.

경장각은 정면 3, 측면 1칸의 구조이다.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와 묵죽도 판각을 소장하고 있다. 명칭과 편액은 정조가 쓴 것으로 전한다.

동재와 서재는 진덕재와 숭의재로 불리며 건립 연대는 청절당과 비슷한 시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재생들에 대한 기록인 원적(학적부)1708년부터 시작하였다.

장서각과 장판각은 1970년과 1971년에 지어졌다.

현존하지 않은 건물로는 강수청과 차노사가 있었는데 강수청은 서원에 입학하기 전단계의 학생들이 사용하던 기숙였고, 차노사는 서원에 소속된 노비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한편 1796년 정조는 필암서원을 사액하면서 서원을 관리할 땅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한편 강당 남쪽 후면에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조헌이 지은 청절당제영계정이라는 싯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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