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 김인후 - 해동의 주자(周子) 호남의 공자(孔子)
하서 김인후 - 해동의 주자(周子) 호남의 공자(孔子)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9.07.15 23:32
  • 호수 78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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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종향된 성리학자이며 도학자

지난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 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 9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번에 등록된 서원 가운데는 필암서원을 비롯해 ▲소수서원(영주) ▲도산서원(안동) ▲병산서원(안동) ▲옥산서원(경주) ▲도동서원(달성) ▲남계서원(함양) ▲무성서원(정읍) ▲돈암서원(논산) 등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서원에 대해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이로써 우리나라에는 경주 석굴암과 불국사,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 수원 화성, 창덕궁,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 조선왕릉, 한국의 역사마을(화회와 양동), 남한산성, 백제역사유적지구 등과 함께 지난해 등록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통도사(양산), 부석사(영주), 봉정사(안동), 법주사(보은), 마곡사(공주), 선암사(순천), 대흥사(해남)과 함께 한국의 서원 9곳이 세계문화유산에 추가되었다.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 선생과 그의 제자이며 사위인 고암 양자징을 배향한 서원이다. 필암서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하여 하서 김인후 선생과 필암서원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1. 하서 김인후의 생애와 사상
2. 필암서원의 역사와 건물의 배치
3. 필암서원에 콘텐츠를 입혀라.


1. 하서 김인후의 생애와 사상
장성신동 천하문장

하서 김인후 선생의 본관은 울산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담재(湛齋)이다. 1510년 황룡면 맥동에서 아버지 참봉 령(齡)과 어머니 옥천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8세때 전라도 관찰사 조원기가 선생과 함께 시를 짓고, 탄복하여 ‘장성신동 천하문장(長城神童 天下文章)이라고 하였다.
9세에 복재 기준(1492~1521, 기대승의 숙부로 조광조와 가깝게 지냈다. 기묘명현가운데 한사람으로 시호는 문민공)을 만났는데 복재가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마땅히 우리 세자의 신하가 되겠다”며 내사필(임금이 신하에게 준 사사로운 물건, 여기서는 임금이 준 붓) 한 자루를 주었는데 선생은 이 붓을 평생 보관하며 복재의 뜻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10세 때에 전라도 관찰사로 내려왔던 김안국(김굉필의 제자,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가 후에 병조판서와 대사헌을 지냄)에게 소학을 배웠다.


18세에는 기묘사화로 인해 화순 동복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신재 최산두를 찾아가 수학하였다.
선생은 복재 기준, 모재 김안국, 신재 최산두 등에게 수학하여 일찍이 환훤당 김굉필의 문하에 신진사림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성리학의 정통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에 이어 환훤당 김굉필에게 전했고, 이이와 이황이 그 뒤를 이었다.
하서 선생이 어려서부터 인연을 맺고 수학한 기준, 김안국, 최산두는 모두 성리학의 정통을 이은 환훤당 김굉필에게 수학하였거나 그의 문인으로 선생 또한 성리학의 정통을 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선생은 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퇴계 이황(1501~1570)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선생은 퇴계보다 9살이 적었지만 퇴계가 1532년 31세의 나이에 성균관에 재입학하여 함께 수학하였다.


짧은 벼슬살이, 큰 족적

선생은 154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임용되었으며 이듬해에 홍문관저작이 되었다. 1543년에는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었는데 이 때 인종(세자시절)이 묵죽도와 [주자대전] 한질을 하사하였다.
인종은 예술에 소질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았는데 선생을 만나 묵죽도를 그리고 화축(두루마리)에 시를 쓰도록 하였다.
선생은 이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는데 인종과 선생의 묵죽도는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회자되었으며 대나무는 세자(인종)를 상징하고 굳은 돌은 하서선생을 상징하여 임금이 될 세자와 충성스러운 신하 사이의 굳은 맹세와 같은 의미를 가졌다.


根枝節葉盡精微(근지절엽진정미) :
뿌리와 가지 잎새와 마디 모두 정미하니
石友精神在範圍(석우정신재범위) :
굳은 돌 벗의 정신이 들어있네
始覺聖神造化(시각성신모조화) :
조화를 바라시는 임금의 뜻 이제 깨달으니
一團天地不能違(일단천지불능위) :
천지에 한결같은 뜻 어길 수가 없도다.


우암 송시열은 “인종은 하서선생의 도덕과 학문의 훌륭함을 알아 성심으로 예우했고, 하서선생은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남을 알아 장차 요순의 정치를 펼 것으로 알았다”고 하였다.
또한 인종이 선생에게 전한 [주자대전]은 1543년 간행되자마자 하사한 것으로 후에 호남지역이 주자학 연구의 선두주자가 되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그해 1월 동궁전 방화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는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6월 홍문관부수찬으로 승진하고 7월에 주강에 나아가 시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기묘사화를 일으킨 심정 등을 소인으로 지목하고 화를 당한 조광조 등의 신원을 적극 주장하였다.
하지만 조정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가가 권력 다툼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선생은 부모를 봉양한다는 이유로 옥과현감을 자청하였다.
1544년 중종이 죽자 제술관(전례문을 짓는 벼슬)으로 잠시 궁에 들어갔다. 이 때 대비전에 있던 인종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는 것을 보고, 선생이 처방에 동참할 것과 인종의 처소를 옮길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생은 다시 옥과현감으로 되돌아갔으나 7월에 사림정치를 기대했던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인종의 죽음에 슬퍼하다가 병이 생긴 선생은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황룡면 맥동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윤씨 외척간의 싸움으로 실질적으로는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가 일어난 후 선생에게 홍문관 교리, 성균관 전적, 성균관 직강 등이 제수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모두 사양하였다.
선생이 벼슬에 몸담은 기간은 불과 5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종이 세자였을 때 만나 맺은 군신과의 의리와 스승과 제자사이의 믿음으로 인해 짧은 벼슬살이를 하였지만 그가 사림에 남긴 족적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인종의 승하와 하서의 절개
선생은 인종이 승하한 뒤 맥동마을로 돌아와 마을 앞에 있는 난산(卵山, 달걀처럼 생긴 산)에서 북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한다.
박세채의 [남계집]에는 “하서는 집의 남쪽에 있는 난산 속에 들어가 밤새도록 통곡하고 돌아와 의지할 데가 없는 듯하였다”고 하였고, 정홍명이 쓴 [기옹만필]에는 “매년 7월의 기일을 당하면 술을 가지고 산중으로 들어가 한없이 통곡하였다.”고 하였다.
선생은 인종이 승하한 몇년 뒤 “임의 나이 삼십을 바라볼 때, 내 나이 서른하고 여섯이었소,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그대, 내마음 돌이라서 구르지 않네, 세상사 흐르는 물 잊혀지련만, 젊은 날 해로할 임 여의고 나니, 눈 어둡고 머리 희고 이가 빠졌소, 슬픔 속의 봄 가을 몇번이던가, 아직도 죽지못해 살아 있다오, 백주는 예전처럼 물가에 있고, 고사리는 해마다 돋아난다오, 오히려 부럽구나 주나라 왕비, 생이별이야 만난다는 희망이나 있으니”라는 유소사(有所思)라는 시를 남겼다.
그의 슬픔이 얼마나 컸으면 눈이 어두워지고, 머리카락이 희어졌으며 이가 빠졌을까? “아직도 죽지 못했다”는 절절함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이 그대로 느껴진다.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3년 뒤인 1548년 처가가 있는 순창 점암촌으로 옮겨 거처하며 훈몽재라는 초가집을 짓고, 학문을 가르쳤는데 이때 정철, 양자징, 기효간, 변성온 등이 수학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이곳에서 [대학강의발]을 썼고 정지운의 천명도를 보고 자신의 천명도(성리학의 이치를 설명한 그림)를 작성함으로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크게 높였다.
선생은 1549년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장성으로 돌아왔다. 1556년에는 서경덕의 [독주역시]를 읽고, 하학(작은 실천을 통한 인격의 수양)을 소홀히 하고 돈오(頓悟)로 이끌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였다.이는 깨달음의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돈오설에 대해 꾸준한 수행과 실천을 강조한 점수(漸修)를 무시하는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성리학자이며 도학자로서의 삶
선생은 1557년에는 [태극도설]과 [서명] 등을 깊이 궁구하고, [주역관상편]과 [서명사천도]를 지었다. 예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가례고오]를 지어 주자가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었다.
1558년 기대승(1527~1572)이 찾아와 일재 이항과 자신의 학설에 대한 시비를 묻자 태극과 음양을 하나로 보는 이항의 설이 잘못되었으며 이를 비판한 기대승의 의견이 낫다고 평했다.
이는 무극이 곧 태극이라고 하는 본체론적인 관점이 아니라 음과 양이라고 하는 존재를 보는 현상론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짐작해본다.
불교에서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고 하는 주장 즉 본체와 현상이 둘이 아니라는 설에 대해 일재가 동의 한 것이라면 고봉과 하서는 현상이라고 하는 과정을 무시하고, 본질만 따지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선생은 성리학자이면서도 전원에 은둔하며 도학을 연마한 도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쓴 시 [자연가]는 도학자의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도 절로 물도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라는 시는 선생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보고 남긴 시가 두 수나 되는 것으로도 짐작하게 한다.
선생이 인종의 승하로 인해 겪었던 아픔과 절망 그리고 그리움을 술과 시로 달래면서 전원에 은둔하며 자연과 일치하려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선생은 1560년 우리나이로 50세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유언은 을사 이후의 관직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인종이 승하한 뒤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절의를 지키려고 했던 그 마음이 유언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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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학3 2019-07-19 17:13:35
○ 인종의 승하와 하서의 절개 중간부분
(현행) ~~훈몽재라는 초가집을 짓고, 학문을 가르쳤는데 이때 정철, 양자징, 기효간, 변성온 등이 수학하였다~~

(변경) ~~훈몽재라는 초가집을 짓고, 학문을 가르쳤는데 이때 양자징, 기효간, 변성온 등이 수학하였다~~

※ 정철 삭제 근거
1. 훈몽재에서 강학한 시기 1548년~1549년
2. 정철이 12살 때인 1547년(명종 2) 아버지 정유침은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다가, 16세인 1551년(명조 6) 원자 탄생의 은사로 풀려나, 이후 조부 산소가 있는 담양 창평으로 이주
3. 《송강문집》 연보에도 정철의 나이 16세 이후 담양 창평에 기거함
4. 따라서 정철은 훈몽재에서 수학하지 않고 1551년(명조 6) 이후 김인후의 제자가됨

후학2 2019-07-19 17:05:06
○ 짧은 벼슬살이, 큰 족적 중단부분
(현행)
~~ 하지만 조정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가가 권력 다툼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선생은 부모를 봉양한다는 이유로 옥과현감을 자청하였다.

~~선생은 다시 옥과현감으로 되돌아갔으나 7월에 사림정치를 기대했던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변경)
~~ 하지만 중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선생은 부모 봉양을 이유로 옥과현감을 자청하였다.

~~조정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가가 권력 다툼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여, 선생은 다시 옥과현감으로 되돌아갔으나 7월에 사림정치를 기대했던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학1 2019-07-19 17:02:30
○ 장성신동 천하문장 하단부분
(현행) ~~선생은 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퇴계 이황(1501~1570)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선생은 퇴계보다 9살이 적었지만 퇴계가 1532년 31세의 나이에 성균관에 재입학하여 함께 수학하였다.~~

(변경) ~~선생은 19세인 1528년 봄 성균관에 입학하여 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33년 성균관에서 선생보다 9살이나 더 많은 퇴계 이황(1501~1570)을 만나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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