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규 열사 - 스물다섯 살의 짧은 삶
이철규 열사 - 스물다섯 살의 짧은 삶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9.05.13 14: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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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민주, 통일의 과제를 남기고 떠난 장성의 아들
황정자여사 “누가 내 아들을 죽였는지 밝혀져야”
이철규 열사의 무덤에 헌화
이철규 열사의 무덤에 헌화

분단된 조국이 통일되고, 그 하나 된 민중이 자유롭고, 민족이 자유로운 완전한 민주주의 구현을 위할 뿐이다” 198511월 반외세 독재투쟁위원회 활동과 관련해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3년을 선고 받아 고등법원에 제출한 항소이유서 적힌 내용이다.

그는 19876.10항쟁에 따른 전두환정권의 직선제 개헌 수용 등의 6.29조치 이후로 7월에 가석방 되었고, 이후 전횡을 일삼던 박철웅 일가의 조선대 재단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1989년 조선대학교 교지인 민주조선에 <미제 침략사 100년사>를 게재해 국보법 위반 혐의로 광주 전남지역 공안합수부에 수배되었고, 현상금 300만원에 1계급 특진이 걸릴 정도로 공안경찰이 혈안이 되어 뒤쫓았던 인물이다.

그해 53일 밤 10시쯤 후배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택시를 타고 무등산장 쪽으로 가던 중 청옥동 제 4수원지에서 경찰의 심문을 받았는데 1주일 후 변사체로 발견됐다.

511일 검찰 주도하에 부검이 실시되었으며 부검에 참가한 국과수 법의학자 이원태 박사는 사체의 허파나 장기내부에 물이 별로 검출되지 않았다고 밝혔으며 조선대 의대 교수들도 정황상 자살에 의한 익사나 실족사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검찰은 국과수에 재부검을 요청하였고, 국과수는 514일 몸의 각 장기에 플랑크톤이 발견됐다며 익사라 발표했고, 검찰도 국과수 발표를 근거로 단순익사라 공식발표했다.

이철규열사의 사체는 발견 당시 얼굴을 위로 한 채 물 위에 떠있었고, 얼굴이 심하게 상해 있어서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없었다. 왼쪽 눈은 돌출되었고 얼굴은 검은색으로 심하게 변색되어 오른쪽 어깨가 심하게 부어올라 단순한 익사체로 보기 어려웠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아직도>

전남지역 대학교수와 재야인사, 학생들을 중심으로 '애국학생 고 이철규 열사 고문살인 규명 대책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철규의 사망원인을 무리하게 고문하다 발생한 사건이라 규정하였다.

하지만 이철규열사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3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89815일 전남 여수 거문도 유림 해수욕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 사건과 함께 아직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사로 남아있다.

이내창은 1989814일 오후 "담배사러 간다"면서 총학생회실을 나가서 다음날 아무런 연고도 없는 거문도 해수욕장에 시체로 떠올랐다. 당시 경찰은 단순 익사로 발표하고 사건을 종결했으나, 정권의 타살설이 계속 돌았다.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의문사위원회의 진상조사에서 815일 오전 안기부 요원이 이내창과 함께 거문도행 여객선에 올랐다는 것까지 확인했으나 더 이상 증거나 증언이 나오지 않았고, 결국 진상규명불가로 종결되었다.

 

<죽은 이철규열사의 열망은 산자들의 과제로 남아>

지난 56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이철규 열사 30주기 행사가 열렸다. 가족과 조선대학교 동문 그리고 민주인사 등 400여명이 참석한 추모제는 열사가 이루지 못한 꿈을 우리가 함께 이루자는 약속이며 바람으로 진행되었다.

이철규열사 장례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던 백양사 방장 지선스님은 30주기 추도사에서 이철규열사의 시신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그가 고문치사로 죽었다는 것은 양심과 상식이 있다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아직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못하였고, 제국주의의 보이지 않는 수탈은 계속되고 있다. 열사가 이루고자 했던 자주, 민주, 통일의 꿈을 산자들이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철우 30주기 행사위원장(5.18재단이사장)보수와 진보의 공통점은 애국이라는 것인데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우리나라 수구집단은 국가는 없고 오로지 이기심만 있다황교안과 나경원이 독재타도를 외치는 사회가 어떻게 민주주의가 완성된 사회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30년 전 갑작스럽게 아들을 떠나보낸 황정자여사는 휠체어에 몸을 기대고 흐느끼면서 누가 어떤 놈이 아까운 우리 아들을 죽였는가. 그것을 밝히고자 했지만 30년이란 긴 세월에 제사를 이러고 지내고 있어요.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 아들 진상을 밝히고 내가 죽어야 할 것인데.”라며 이렇게 와줘서 고맙고, 우리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데 더 힘써주세요라고 호소하였다.

한편 지난 51일 이철규열사의 평전 청년 이철규’(출판사: 문학들)는 이철규열사의 벗이자 민주조선 편집위원이었던 조성국 시인이 대표집필을 맡아 출판을 완료했다.

조선대 교정에 자리 잡은 이철규열사 추모비(1992년 건립)도 지난 4월 전정호 화백, 천현노 작가를 중심으로 100여명이 참여해 추모비 보수공사를 마쳤다.

 

<장성의 아들 이철규 열사의 짧은 삶>

민족자주와 통일을 꿈꾸던 이철규열사는 1964년 삼서면 대도리에서 이정진 씨와 황정자여사의 3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삼서초등학교와 삼서중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금호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805.18민주항쟁 때는 부상자를 실어 병원에 후송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982년 조선대학교 공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하였고, 1985년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되었으며 학교에서는 제적되었다. 1988년 학교에 복적되어 19891월 조선대학교 교지인 [민주조선]편집위원장이 되었다.

1989년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 1992년 조선대학교 교정에 추모비 제막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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