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막내딸, 가난한 집 둘째아들에게 시집가다
부잣집 막내딸, 가난한 집 둘째아들에게 시집가다
  • 장유이 기자
  • 승인 2019.04.02 1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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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옥심 할머니의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충무1동 노인복지회관의 오후 3.

10여명의 할머니들이 점심식사 후 초록담요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화투패를 손에 잡은 선수는 4.

요놈을 내가 먹어야제.” 먹을 패가 있는 할머니는 기분이 좋다.

하지만 풀리는 사람이 있으면 안 풀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

아이고~. 내가 먹을라고 했는디 자네가 먹어분가?” 패를 놓친 할머니는 저 패가 아쉽다.

힘내라며 두유에 빨대를 꽂아 건네는 할머니. 딸기를 씻어내오는 할머니, 훈수를 두고 싶지만 꾹 참고 있는 할머니. 조용히 경기를 관람중인 할머니 등 경기장의 열기가 뜨겁다.

 

지난 25일에는 평소 그런 일이 별로 없는데 무슨 일인지 샥실댁 할머니가 돈을 땄다.

오후에는 이렇게 회관에 놀러 나와서 같이 놀기도 하고 밥도 먹고 그래. 재밌어. 근디 오늘은 뭔일인가 모르겄네. 평소에는 내가 맨날 지기만 했거든. 근디 오늘은 내가 따갖고 다른사람 치라고 양보했어. 참 별일이네잉샥실댁 할머니 기분이 좋다.

 

샥실댁

샥실댁은 송옥심(86) 할머니가 샥실마을에서 시집왔다하여 얻은 또 다른 이름이다. 그 이름으로 불린 것도 60년이 넘었다. 샥실마을은 사람들이 지금 이곡마을을 부르던 별칭이다.

이 기분 좋은 날, 할머니는 잠시 화투경기를 양보한 틈에 자신의 지난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긍께 내가 22, 우리 집 아저씨가 23살 때 만났제...”

 

22살 옥심아가씨와 23살 김씨 총각 이야기

옥심 아가씨는 사창마을에서 꽤 잘사는 부잣집의 막내딸이었다. 일꾼 둘을 데리고 살았으니 나름 잘 살았던 편이지 않은가. 아버지는 아가씨 11살에 결핵으로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큰오빠가 일제 때 농업학교를 나와 광주도청에서 근무했고, 7칸짜리 공장을 지어서 직공4명 데리고 국수 방앗간 솜틀 등등 하는 공장도 했으니 그래도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다. 선생님 예쁨도 받으며 즐거운 학창시절도 보냈다. 정말 남부럽지 않은 유년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6.25사변이 터졌다. 사창이 불바다가 되었고 학교도 불에 타버려서 그 후로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23살의 이리농업학교에 다니던 김씨 총각을 만나 시집을 갔다.

 

김씨 총각은 지독히도 가난한 집의 둘째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책벌레였던 그는 깔을 베러 갈 때도, 지게를 지고 내려오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공부를 저렇게 좋아하는데 공부를 안 시키면 안되겠구나 싶어 어려운 형편에도 공부를 가르쳤고, 그래서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까지 갔다. 하지만 6.25로 인해 대학을 마치지 못했다. 결국 고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 되었고 22살 옥심아가씨를 만나 장가를 갔다.

 

<결혼... 그리고 가난>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둘은 아가씨의 친척뻘, 총각의 문중 어른의 중매로 만났다.

맞선도 없었다. 총각의 어머니와 형수가 선을 보러왔고 그렇게 성사가 되어 혼인을 했다.

시댁은 지독히도 가난했다. 가진 것이라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집이었다.

아가씨를 총각에게 시집을 보낸 것은 오로지 울산 김씨가 양반 집안이라는 이유 하나였다

아무것도 없는 집의 둘째 며느리.. 그것이 현실이었다.

집안의 일이란 일은 다했다. 막내딸로 귀여움만 받고 자라다가 시집을 오니 맞닥뜨리게 된 고되고 고된 일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열심히 일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혼 4년만에 분가해서 나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분가 안하면 서울에 식모살이 하러가겠다고 했다. 식모살이를 하면 남편 담배값이라도 벌수 있으니까.

내가 오죽했으면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러 가겠다고 했겠어. 진짜 고생한 거는 말도 못해...”

그렇게 억지를 부려 남의 집 부엌방 한 칸을 얻어서 분가를 했다. 말이 분가지 한마디로 머슴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머슴부리며 살던 집의 막내딸이 남의 집 머슴으로 들어가 밥 얻어먹고 살게 되다니...

시집와서 보리 섞인 밥을 내오자 이렇게 가난한 집에 막내동생을 시집 보냈다며 큰오빠가 울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머슴 일을 해서 밥을 얻어먹게 된 처지가 되어버린 것. 집의 쌀밥이 지겨워서 가끔 수수밥과 바꿔먹자던 철없고 풍요롭던 막내딸이 이제는 일당 몇 푼을 벌려고 품삯 일까지 하러 다니게 된 것이다.

살면서 그때가 제일 서러웠어. 한번은 그 집에서 모를 심는데 우리 딸을 망태에 앉혀뒀거든. 그런데 개미가 달라드니까 우리 딸이 막 울더라고. 그래서 울지말라고 딸을 달래는데 울어도 안죽네!’라고 소리치더라고나에게 항렬로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었는데 애기들 운다고해서 죽지 않는다고, 일하라고 하더라고일이 서투른데 그래도 그렇게 남의 집 일을 해주고 살았어.”

그리고 4년만에 드디어 그 집을 나왔다.

모아둔 돈과 친정에서 보태준 돈으로 부엌과 방2개 있는 오두막집을 얻어서 그곳에서 10년을 살았다.

남편이 농촌지도소에서 근무를 했는데 구례로 발령을 받아 남편은 그곳에서 생활하고, 한달에 한번씩 월급을 받을때면 왔다. 그 당시 공무원의 월급이 무척 적었다. 남들은 월급 외에도 돈을 가져주었다는데, 남편은 워낙 정직하고 고지식한 사람이라 월급외의 돈은 일절 없었으니 그 돈으로 4남매를 키우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혼자 아이들 데리고 나무를 해다가 뗄깜으로 떼면서 살았다.

다행이었던건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서 학비가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큰아들이 공부를 잘했어. 학교에서 심화반을 운영하는데 거기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했거든. 그런데 그 돈이 아깝다고 심화반에 안 들어가고 혼자서 공부했어. 그 아들이 서울대에 장학생으로 합격해서 기숙사에 넣어주고 오는데, 그렇게 마음이 좋더라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해서 집에 올 때까지 울었어. 남편이 좋은 일에 왜 그렇게 우냐고 해서 좋아서 운다고 했지. 그때가 그렇게 좋더라고

서울대에 장학생으로 들어간 큰아들은 카이스트에서 석·박사까지 취득하여 현재 대학교에서 부총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작은아들은 경기대를 졸업하고 시립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대학강사로 근무중이고, 셋째아들은 전남대에 장학생으로들어가서 현재 농협에서 근무중이다. 딸도 순천에서 제법 잘 살고 있다.

사실 아들을 넷을 낳았어. 그런데 첫째아들이 4살에 뇌염으로 죽었어. 런닝셔츠 입고 태극기사쇼!’하고 뛰어다니며 놀던 아이였는데 그 아들도 항상 보고싶지그러니 지금 큰아들이 둘째아들이야

 

<그리움...>

남편은 성품이 좋은 사람이었어. 오히려 성미가 급한 건 나였지. 남편은 대학까지 갔지만 나는 못 그랬잖아. 그래도 내가 큰소리 내면서 살았어.

남편이 정년퇴직해서 고향으로 왔는데 자꾸 왼쪽을 문지르더라고. 위암이었어. 당뇨를 앓고 있었는데 거기에 합병증이 온거지. 그래서 발견하고 1년만에 돌아가셔버렸어. 장성병원에서... 살려보려고 서울 아산병원에도 모셔 가 봤는데 소용없더라고.

유언도 없었어. 친구내외가 병문안을 왔는데 그 내외가 집에 돌아가기 전에 숨을 놓더라고. 아마 나 혼자 있을 때 죽으면 쓸쓸하겠다 싶어서 그 친구라도 오니까 그 덕분에 마음놓고 죽은 것 같아. 남편이 그렇게 떠난게 아쉬워... 고생만 하다가 이제 좋은일만 보며 살면 됐는데 그렇게 가셔버렸어.

큰아들 교수된 것까지는 봤는데... 다른 자식들 잘 된거는 못보고 돌아가셨어. 그게 그렇게 마음이 아파....”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붉히는 송옥심할머니.

젊은 시절 지독히도 가난했던 결혼생활이었지만, 그래서 어쩌면 원망이 될만도 하건만 원망이 아닌 그리움으로 기억되는 남편. 남편은 어쩌면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가까운 사람, 아내에게 미움이 아닌 애틋함을 선사해 주고 갔으니 말이다. 22살 아가씨와 23살 총각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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