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의 3.1만세운동
장성의 3.1만세운동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9.02.27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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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리 만세운동 재조명해야
종교, 학교, 장터 등 3.1만세 운동의 특징 모두 나타난 곳

<기독교와 사립교육기관 그리고 장터에서 3.1운동>

3.1 만세운동은 종교계(기독교, 불교, 천도교)와 서당과 민족학교 청년, 학생들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만세운동의 장소는 5일장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으며 때로는 교회 안이나 시가지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시장은 상품 유통을 비롯하여 문화행위와 통혼 등 지방사회 모든 분야의 매개고리 역할을 담당할 뿐 아니라 위기를 맞아서는 집회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장성에 최초로 기독교(개신교)가 들어온 것은 천주교보다 30년이 늦은 1903년 미국 선교사 배유지(Eugene Bell)가 삼서면 보생리에 세운 보생리교회다. 이어서 황룡리 교회가 설립되었고, 1905년에는 소룡리 교회가 설립되었다.

3.1만세운동과 관련된 사립학교는 1918년 성산리 복산마을에 정선유목사에 의해 설립된 삼일학교(숭실학교)로 정선유목사가 교장을 견하고 있었으며 교사는 4, 당시 학생수는 150명 가량이었다.

모현리 만세운동을 주도한 정병모는 서당 훈장이었으나 서당의 이름은 전하지 않고,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모현리 만세운동을 함께 한 신경식씨 등이 설립한 오북의숙은 젊은이들에게 민족 자주 정신을 함양하고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 위한 곳이었다.

사거리장은 장성군에서 황룡장 다음으로 큰 5일 시장이었다. 43일 모현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다음날인 44일 사거리시장으로 이어졌다.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씨가 체포되어 구속된 것은 사거리 시장에서의 만세운동이 결정적인 이유이다.

 

<장성의 만세운동은 31일 이전부터 계획되었다>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일어나고 유학생인 정광호가 귀국하여 이를 알리고 서울에서 유학중이던 김범수, 박일구, 최정두 등과 만나 2·8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배포키로 뜻을 모았다.

장성 출신인 박일구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처가가 있는 북이면 백암리 김기형의 집으로 내려와 정광호가 가지고 내려 온 등사판을 이용하여 한글로 된 독립선언서 약 600장과 일본어로 된 독립선언서 약 50장을 인쇄하였다. 이 때 인쇄된 2·8독립선언서는 정광호·박일구 등이 지니고 경성으로 잠입, 많은 사람들에게 배포되었다.

그 후 박일구는 1910년대 만들어진 광주 부동교(광주 동구 불로동과 남구 사동을 잇는 다리) 부근에 있는 장터에서 작은 장날인 310일 오후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날 장터에는 기독교인, 숭일학교, 수피아여고생, 농업학교생 등 1천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돌아다녔고, 시위군중은 늘어났다.일본 경찰은 총칼로 시위를 제지하였고 박일구는 이때 체포되어 이해 9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소룡리 만세운동과 숭일학교 만세운동>

3.1운동 당시 기독교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사립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3.1만세운동에서 기독교의 참여와 역할은 천도교와 더불어 가장 컸으며 구속자도 다른 종교집단에 비해 많았다.

소룡리교회는 1905년에 설립되었으며 장성의 초창기 교회에 속한다. 소룡리 교회에는 광주 숭일중학교 교감 송흥진의 제자인 송주일이 교회부설 소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송주일은 은사인 송흥진으로부터 광주의 만세운동에 대한 서신을 받고 310일 정오를 기하여 학색들을 통해 은밀하 신자들을 모이게 했다.

70여 명의 신자들이 모이자 조선은 이제 독립되었으니 너는 면사무소와 거주지 이장은 물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 좋은 소식을 알려라. 광주에서는 벌써 학생들은 물론 모든 민중이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는 편지를 읽고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송주일은 317일 더 많은 사람이 모여 만세시위를 할 것을 조00 등과 상의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기독교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은 성산읍 정선유목사의 주도하에 추진되었다. 정목사는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191810월 성산리에 교회와 야학(숭실학교)을 세워 교사 최에리사, 조준식, 고경상, 신도일과 함께 150여 명의 학생들에게 민족사상과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19192월에 2.8독립선언 소식을 듣고 청년들과 비밀집회를 갖고 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하지만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읍면에 연락하여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전선유목사의 숭실학교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당하였고, 정목사가 세운 교회는 아직까지 성산에 전하고 있다.

 

<장성 3.1운동의 뿌리는 의병활동에서>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인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었으며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에 저항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노사 기정진의 위정척사 사상은 의병활동의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

노사의 손자인 송사 기우만은 상소 투쟁과 함께 이항선,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성재 기삼연도 노사의 제자로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을 맡아 실질적인 전남의병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기삼연이 이끈 호남창의회맹소는 주요 인사가 장성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전남의병을 선도하였다.

이밖에도 북이면 출신의 김영백의병장, 진원면 출신의 강사문의병장 등의 활약은 손꼽을만하였으며 전장에서 죽거나 재판을 받아 교수형을 당한 의병들도 적지 않았다.

장성읍 장안리 변순기는 송사 기우만의 제자로 함평농업학교 교사출신으로 광주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노사의 위정척사 사상이 기우만을 거쳐 변순기에 이어진 것이다.

 

<자발적인 조직을 꾸린 모현리 만세운동>

모현리는 모현, 평촌, 화동, 북촌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30년 전까지도 100여 가구에 43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모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기 전까지 있었던 오산현에 이웃하였고, 향교가 있던 교촌에서 가까워 일찍부터 교육열이 높았던 곳으로 짐작된다.

모현리 만세운동은 서당 훈장이던 정병모(39)의 주도로 서울과 장성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음력 삼월삼짓날인 43일 화전놀이 풍습을 핑계로 만세운동을 갖기로 하였다. 이들은 미리 광목천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쓰고 태극기를 만들어 43200여명의 주민이 모여 각 마을을 돌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대가 이 소식을 듣고 류상설(30), 고용석(25), 류상학(46), 신진식 등을 체포하여갔다. 일본 헌병이 돌아가자 정병모, 신경식, 신상우 등이 사거리장날인 다음날 시위를 벌일 것을 약속하고 밤새도록 60여 장의 태극기를 그려 사거리 장에서 만국강화회의에서 식민지국가들의 독립이 승인되었으니 이제 조선도 독립이 되었으며 전국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며 가져온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수백여 명의 면민들이 이에 동참하였다.

일본 헌병대는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정병모, 신상우, 신태식씨를 체포하였다.

 

<모현리 만세운동의 의의>

모현리 만세운동으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10명이다. 한 마을에서 독립만세운동으로 10명이 구속된 사례는 전국에도 없는 드문 일이다.

또한 모현리 만세운동이 사거리 시장으로 확산되어 그 영향이 북이면 전체로 파급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런데 사거리 시장이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장소라는 점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당시의 상황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는 안내판이라도 설치되어야 할 것이다.

만세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이들은 신간회가 설립되자 신간회 장성지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신경식, 류상능은 현재 신양호의 집에 오산현 북쪽이라는 뜻의 오북의숙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시리즈를 보도하였으나 자료가 미비하고 당시를 증언할 사람들도 세상을 떠나고 없어 안타까운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장성군사에서도 기록되지 않았던 장성농민조합, 협동조합 사건 등을 발굴하여 보도한 것은 묻혀버릴지 모를 역사를 다시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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