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장성'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장성'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9.02.19 00:25
  • 호수 7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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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휴업에 이어 전국 확산에 신간회의 역할

192911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구한말 의병활동과 1906년 면암 최익현의 호남의병 봉기에 이어 19193.1독립선언과 전국적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3.1독립선언이 있고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19266.10일 순종임금의 장례식 날을 기해 전국적으로 대한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27년 설립된 신간회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간의 통합을 이룬 것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데 신간회 광주지회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또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8년 광주고보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동맹휴교의 연장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28626일부터 시작한 광주고보 학생들의 맹휴는 지난 호에 보도했던 장성읍 변진설 등이 주도하였다. 그 때 작성한 격문에는 용사들이여 결사적으로 싸우라! 우리의 승리는 맹휴중인 우리들 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피압박 백의민족 해방의 초보가 되고 원천이다(중략) 자유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라.”고 하였다.

동맹휴교의 목적이 백의민족의 해방과 자유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변진설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초 동맹휴교를 주동한 세력을 1선이라고 하고, 1선이 무너지면 2, 3선이 조직되어 있었다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은 아마도 3선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1920년대 후반 학생운동이 독서회, 소비자조합 등을 만들어 비밀결사 조직으로 변화하였다. 1925년부터 시작한 치안유지법과 1926년에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학생단체에 대해서도 탄압이 심해지자 학생들은 맹휴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동시에 보다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해 나갔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산파역인 성진회와 독서회>

성진회는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다. 1926113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왕재일과 장재성, 광주농업학교 학생인 박인생 등은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고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조직체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성진회를 결성했다.

회원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비밀히 단결할 것을 결의했으며,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독립을 이루기 위한 실천 방법을 상의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성진회는 활동한 지 5개월 만인 19273월 비밀이 누설 될 염려가 생겨 표면상 해체했고,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각 학교 단위로 활동하는 형식으로 모임을 계속했다.

19296월 중순에 동경에 유학했던 장재성이 학업을 중단하고 광주에 돌아와 광주고보, 광주사범, 광주농고의 학생들과 양림리에 있는 김기권의 집에 모여 독서회 중앙본부를 결성했다. 이어 각 학교별로 독서회가 조직되어 민족문화와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민족의식을 드높이는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독서회는 학생들을 통솔하고 지도하는 조직으로 발전해갔으며, 이는 결국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굳건한 바탕이 되었다. 이때 김기권과 장재성은 학생소비조합을 만들어 자금 조달에 노력하였다.

192911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된 날은 일본의 4대절의 하나인 명치절이었고, 우리 민족으로서는 마침 음력 103일로 개천절이었으며, 광주 학생들의 독서회원들에게는 전신인 성진회 창립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과 호남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는 광주역이다. 나주와 함평 학다리 그리고 송정리와 장성에서 통학하던 학생들은 광주역을 통해 등하교를 하였고, 일본인 자녀들 역시 호남선 기차를 통해 통학을 하였기 때문에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은 언젠가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장성출신 학생들은 백양사역과 신흥리역 그리고 장성역에서 광주역으로 통학을 하였는데 광주 학생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학생 결사 모임 성진회에 참여한 김기주와 김종선은 교사였고, 나승규(31)와 송종근(39)은 농업으로 나승규는 1927년 결성된 신간회 장성지회의 서기 그리고 송종근은 대표회원이었다. 학생신분이 아닌 이들이 성진회에 참여한 것은 이들이 학생들의 지도적 위치에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성진회에 참여한 교사 김기주와 김종선은 서삼면 출신으로 같은 동네에 살던 송종근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송종근은 서삼면 송현리에서 태어났으며 구한말 성균관 박사(교수)였던 송영순의 손자이며 대구세무서장을 지낸 송규락의 아들이다. 한마디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엘리트였던 것이다. 그가 24세 때 만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 선생을 만나 조선독립사상을 품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7년 동안 석주 선생의 곁에 머물렀다가 돌아왔다는 것은 이미 보도한 바 있다.

따라서 신학문을 배운 젊은 청년들이 송종근의 애국심과 독립의지에 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해 재판을 받은 사람 중에 송종근, 이영백, 김기주 세 사람은 2년 뒤 장성의 노동조합, 정미조합, 협동조합, 농민조합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처벌을 받게 된다. 1929년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미완에 그치자 고향으로 돌아와 조직을 결성하고 다시 조국해방을 위한 투쟁을 이어간 것이다.

 

<껶여버린 청년의 꿈 김기주>

성진회에 참여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지도역할을 하였고, 장성으로 돌아와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대구 복심법원의 판결문에 송종근. 이영백, 김기주 등은 자본가와 지주의 착취가 없는 새로운 사회, 즉 사유재산제도를 부이노하는 공산주의 사회를 일으킬 생각으로 협동조합, 정미조합, 농민조합 등을 결성하여 노동자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고 결속을 공고히 하며 한결같이 총독정치를 저주하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김기주는 19081210일 서삼면 장산리에서 태어나 광주사범학교 2학년에 재학 중 같은 학교 3학년생 하의철 등과 함께 19274월 민족차별 교육을 일삼던 일본인 교사 강전(江田)을 다른 학교로 몰아내는데 주동 역할을 하였다.

19283월에 학생 간부로 선임되어 교내 항일학생운동 조직의 확대에 노력하였고, 19293월 졸업을 기해 송동식, 홍귀주 등과 모여 졸업 후의 항일운동에 관한 방도를 논의하였다.

졸업 후 교직으로 나아가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광주사범 독서회 활동에 참여하고 있던 중 1929113일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였다.

일본 결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고, 옥고를 치른 뒤에는 장성에서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을 결성하여 조선독립을 꾀했으나 1940년 서른 두 살의 꽃다운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사상가 송동식(宋東植)>

1907129일 장성읍 영천리에서 태어난 송동식은 광주사범학교에 재학하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근간이 되었던 독서회에 주도적 활동을 하였다. 독서회에 참여했던 학생들 중에 1심에서 가장 무거운 징역 4년을 언도 받았고, 2심에서는 감형되어 징역 2년의 실형을 살았다. 독서회의 전신인 성진회가 해체 된 후로도 항일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기 위해 192810, 김시성의 하숙집에 모여 성진회의 사업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의하고 각 학교 단위로 활동을 분담하였다. 19293, 선배회원인 임종근, 김기주 등의 졸업에 즈음하여 동교 졸업생 및 재학생 회원 12명과 함께 당시 광주읍내 중국요리점 영빈루에 모여 졸업 후에도 항일학생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하고 졸업생과 재학생간의 단결을 다짐했다.

그 후 19296, 동경에서 돌아온 장재성이 성진회 해체이후 분산적으로 지속되었던 항일학생운동에 대하여 조직적 활동을 주장하여 독서회중앙본부를 조직하였는데 그 때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조직의 편성 및 연구방법의 지도를 맡았다.

같은 해 7월에 광주사범학생 15여명과 함께 수피아여학교 뒷산에 모여 비밀결사 조직을 협의하고 9월에 광주형무소 뒷산에 다시 모여 광주사범학교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그는 동회의 대표로 선임되었다.

1929113,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8세의 청년학생 김병기(金炳基)>

1913916일 북상면 덕재리에서 태어난 김병기는 광주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인 18세에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저극 참여하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19296월에 김상환 등 광주고보생 20여명과 함께 무등산에서 항일학생비밀결사인 광주고보 독서회를 조직하였고, 11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김상환 등과 함께 앞장서서 괭이· 나무 몽둥이 등을 들고 가두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활약하였다.

1931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19573174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훈장 없는 영웅 - 이영백>

본지는 지난 129일자에 1934년 장성노동조합, 농민조합, 정미조합, 협동조합 사건으로 10명이 실형을 받았으나 장성군사를 비롯한 독립운동사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보도를 하였다.

이들의 판결문에 조합의 설립목적이 조선의 독립에 있다는 것이 명시되었는데도 이 역사적 사건은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그동안 묻혀 있었던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많은 청년학생들이 죽은 후에라도 훈장을 받거나 대통령표창을 받았지만 장성읍 영천리 출신의 이영백(당시 23)은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

노동조합 사건의 김시중을 비롯한 9명과 독서회를 주도한 장재성 역시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회주의 계열의 인물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목숨을 건 독립운동을 하고 감옥에 들어가 옥고를 치렀음에도 불구하도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공을 인정받지 못한 나라. 남북의 분단은 조국해방의 영웅마저도 이름없는 풀과 나무처럼 홀대하게 만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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