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경사 변순기와 봉암 변진설
독립운동가 경사 변순기와 봉암 변진설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9.02.12 0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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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옥고를 치르고
봉암 변진설은 출가하여 승려(월주스님)가 되다

변순기(舜基)선생은 자는 중화(重華)이며 호는 경사(耕史)이니 1884(고종 21) 516일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에서 아버지 쌍용(雙容)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익히고 광주농림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으며 함평학교에 교사로 재임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침탈하여 학교에서 애국계몽을 가르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학교를 떠나 송사 기우만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 후로 함평여관을 운영하며 동지를 모아 변호사 서정희 등과함게 조국해방의 뜻을 펴기 위한 모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919310일 광주에서 김복현 등과 함께 1,000여명의 시위군중을 주도하여 독립선언서와 경고문 및 독립가를 인쇄 살포하고 태극기와 모자 등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면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해 4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언도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8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1921년부터 송사 기우만의 제자로서 전남학계의 대표로 활동하였고, 192712월 신간회(新幹會) 장성지회가 창립되자 적극 가담하였고, 세금 불납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장안리 입구에 있는 영사정(永思亭 : 서당)에서 문맹퇴치를 위해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배후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15월 신간회가 해체되는 날까지 후배 양성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광주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을 때는 조선사람이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며 당당하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장안리 봉암서원 입구에 선생의 생애와 애국활동에 대한 기적비(紀績碑)가 세워져 있다.

 

<승려가 된 독립운동가 변진설>

 

변진설(鎭偰)19091113일 장성읍 장안리에서 아버지 변순기와 어머니 조요기 여사와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부터 장안서재(書齋)에서 한문을 배웠고, 성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광주고보를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선생이 1928년 광주고보 4학년 때 만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만주 등지에서 조선독립군의 활약을 듣고, 일제의 탄압에 반항하는 동맹휴업을 주도하며 악랄한 식민지정책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5월부터 동맹휴학을 시작하여 1선이 구속되어 무너지면 2선이 이어가고 또 2선이 구속되면 3선이 시위를 이어갔는데 이 것이 전국으로 확산된 192911월 광주학생운동의 단초가 되었다.

1928826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지난 23일 장성경찰서 형사 4명이 광주고보 동맹휴업으로 퇴학 처분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 있던 변진설을 검거하였고, 정학처분을 당한 장성의 김천기와 김인중 등을 소환조사한 뒤 두 사람은 석방하고 변진설만만 구금하였다고 하였다.

19281025일 광주지법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항소하였고, 그해 1129일 대구 복심법원(고등법원)에서 징역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출소하였다.

출소한지 한 달 뒤인 192812월 변진설은 양친에게 출가할 뜻을 전하고 19291월 백양사 약수암으로 입산하였다. 48일에는 만암대종사의 증명으로 사미계를 받고, 운문암에서 참선하며 수행을 시작하였다.

 

<백용성스님의 제자가 되어 독립자금을 공급하다>

독립운동가 변진설에 대한 기록은 그가 출옥한 뒤 승려가 되었다는 내용이 그의 부친인 경사 변순기의 기적비에 나타나 있는 것 외에는 거의 없다.

변진설은 출가하여 법명을 월주(月舟), 법호는 백용성 스님이 제자로 받아들이며 지어준 봉암(鳳庵)이다. 법호를 봉암으로 한 것은 그가 태어난 장안의 봉암서원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출가하여 법명 월주가 된 그는 백양사에서 송만암스님에게 처음 참선 공부를 시작하여 화엄사에서 당대의 불교학의 대가였던 진진응 스님에게 불교경전을 수학하였다. 1939년 독립선언문 33인 가운데 불교계 대표였던 백용성스님의 문하에 들어가 그로부터 법을 전하는 전법게를 받았다.

서울 대각사에 있던 조선불교선종총림 문서에 의하면 당시 용성스님에게 전법게를 받은 승려가 4명이었는데 변진설은 법명이 월주(月舟), 법호가 봉암(鳳庵)으로 나타나 있다.

월주스님은 1938년까지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에 있는 화과원 원주(주지)로 재임하였는데 화과원은 일재시대 독립운동가의 독립자금을 제공한 곳으로 드러났다. 동아대학교 최영호교수는 [함양 백용성 선사 화과원 유허지 국가사적 승격 지정 용역보고회]에서 화과원을 "백용성 선사와 당대의 선지식인들이 선농 불교를 실천하면서 항일독립운동과 함께 불교의 개혁, 사원의 자립경제, 지역 빈민 아동의 교육복지사업, 불교 경전의 역경과 저술 등을 전개한 역사·문화적인 거점 공간"이라며 “'화과원(華果院)'이 독립자금을 대던 단순한 농장이 아니라 항일독립운동과 불교개혁의 역사·문화적 거점이라고 주장했다.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에 있는 화과원은 477274의 임야로 일제강점기 3·1 운동의 민족대표로 항일민족운동과 함께 불교개혁운동을 실천한 백용성 선사가 1927년 설립하여 운영한 곳으로 월주스님이 이 곳의 원주(주지)로 실질적인 운영을 한 것이다.

그는 1941년 조선불교선종(현 대한불교조계종)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해인사 법보학원 강사, 대원사 강원 강사를 역임하였고, 해방 후에는 해인대학, 마산대학 교수로 재임하며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월주스님은 왜 잊혀버린 인물이 되었나?>

백용성 스님의 제자로 화과원 원주를 지낸 월주스님은 불교계는 물론 장성에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그의 업적과 족적에 비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월주스님은 일제시대 홍덕희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딸 주이를 낳고 바로 헤어졌다. 변주이씨는 아버지 월주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스무 살 때 진해 대광사를 찾아가서였는데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주이씨의 큰딸이 스위스에서 유학을 하고 청도 운문사로 출가하여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월주스님은 한국불교가 비구와 대처싸움이 일어나면서 조계종이 종조(宗祖)를 태고보우국사에서 보조지눌선사로 바꾸자 이를 아버지를 바꾸고 조상을 갈아치우는 것(換父易祖)이라며 태고종의 입장에 섰다. 월주스님의 첫 스승인 만암대종사도 보조지눌을 종조로 세우자 종정을 버리고 백양사로 내려왔다.

불교계의 싸움에 환멸을 느낀 월주스님은 경남대학교의 전신인 해인대학과 마산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오직 제자들의 양성에 전념하였다.

마산대학이 경남학원에 넘어가자 학교를 떠난 그는 은둔수행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981년 입적하였다. 2006년 일제강점기의 학생운동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로써 아버지와 아들이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에서 포상을 받은 드문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월주스님이 만주의 대각교 농장과 함양 화과원의 원주로 재임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는 것은 소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증명하기 어려워 그의 공적에 수록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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