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은 참으로 여러 모습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처럼 한번 만나면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이 있고, 술을 좋아해 늘 코가 빨간 렘브란트형의 인간이 있고, 생활고에 찌든 우울한 고흐의 모습이 있다. 또 주어진 그 모습을 고치지 않겠다고 강조하는 서정주의 모습이 있고, 우물 속 자신의 모습을 신뢰할까 말까 하는 윤동주의 자화상이 있다.
그 생김새들 또한 똑같은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 인간의 얼굴은 人口數와 정비례할 것이다. 굳이 유형으로 구분 할 필요는 없지만, 영화 [관상]은 고집스레 분류해보려 애쓴다. 그리고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고자 한다. 하지만 인간의 모습이 어디 그 딴 線이나 面 몇 가닥으로 가늠이 가능하던가.
명화 [최후의 만찬]을 그린 다비치는 예수와 12명의 제자를 그릴 때 예수를 가장 온화하고 평안한 얼굴로, 예수를 배반한 유다를 배신의 이미지에 맞춰 그려 넣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예수의 얼굴은 성가대에서 활동하는 ‘피에트로 반디네리’라는 반듯한 청년을 모델로 그림을 완성했다.
그런데 유다, 즉 배신의 이미지를 찾으려고 각고의 노력을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로마시장의 도움으로 죄수 한 명을 찾아내어 그리게 되었다. 다빈치는 죄수의 이미지가 배신의 얼굴과 맞아 떨어진다고 흡족해하며 그림을 완성했다.
그림을 완성하고 돌아서려던 죄수가 다빈치를 향해 물었다. “다빈치 선생님, 혹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얼마 전 예수 모델이었던 ‘피에트로 반디네리’입니다”했다. 이렇듯 인간의 모습은 상황 속에 있다. 아니 어쩜 상황 속에서만이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명품으로 도배하면 분명 아름답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어 보인다. 그것은 그 상황이니 그러하다. 폄하하거나 비난할 필요 없다. 스스로 일궈낸 것도 부모 잘 만난 배경도 다 좋은 상황일 뿐이다.
사실 인간의 얼굴 중 가장 바람직하고 닮고 싶은 것은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다. 즉 그리운 얼굴이다. 누군가에게 그리 보일 수 있다면 성공한 얼굴이다. 자화상을 남기지 않아도 가슴에 새겨진 영원한 ‘큰 바위 얼굴’이다.
이명박 양승태 장로의 얼굴이 이렇게 뒤바뀔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현재의 상황이 취임사를 읽어내던 그 영광스럽던 얼굴에 귀 잘린 고흐의 어두움을 그려 넣었다. 그러나 고흐처럼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길 수도 비싼 ‘해바라기’도 한 점 남길 수 없게 되었다. 고흐보다 넉넉한 삶을 살았을지는 몰라도 그만한 인생이라고 평가 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
성형외과를 통해 관상을 바꾸기도 하지만, 트레이닝을 통한 변화도 있다. 하지만 각색된 이미지는 양보할 수 없는 것들 앞에선 무너진다. 어떤 목사님들의 교회 주도권 다툼이 그러하고 여인의 가슴을 더듬는 손버릇을 멈추지 못해 엄동설한을 감방에서 보내고 있는 몇 몇 목사님들이 그러하다.
차라리 투박한 어투, 벌거벗은 몸짓이 좋다. 인자한 얼굴 상냥한 말씨 그리고 다정다감한 태도… 지능이 부족한 필자 부류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끝까지 그 모습, 그 얼굴, 그 상황을 지켜내는 목자들이 많으니 이것 또한 우리 주변의 한 상황일 뿐으로 매듭하고 그만 회자를 멈추자 한다.
내일은 쌍수 견적이나 받아볼까 한다. 부풀어 오른 눈꺼풀이 우습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상황 하나 바꿔 보려는 의도치곤 소소할지 모른다. 빈정거림 같은 게 섞이지 않으면 쉽게 사랑하고 마는 오래된 습관이다.
당신의 얼굴은 지금, 안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