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교육 중 가장 처음 접하는 과목이 예절교육이다. 유치원 아동의 배꼽인사를 시작으로 인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몸짓에선 예절보다 중요한 게 없다고 여겨왔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예절의 가치를 넘어서는 교육은 없다. 예절은 교육의 시작이자 그 끝이다.
오랜 기간 배우고 실천하기 어렵지 않은 예절, 그럼에도 우리 인간의 행위 가운데 완성도가 취약한 부분이다. 왜 그럴까. 동양의 학문, 그 중 중국의 경서들은 온통 예절에 관한 말이고 서양의 철학자 제임스 밀은 다중을 곁들여 예절의 밀도를 계량화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예절의 만족도는 늘 먼 곳에 있다.
돌아보면 예절은 삶이다. 어떤 고통도 대가도 수반하지 않는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라는 말도 아니다. 그럼에도 어렵기만하다. 스펙을 위해서라지만 그다지 사용 가치 없는 자격증은 갖은 노력을 해서 따면서도 손쉬운 행위를 통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범절한 사람의 기회는 지나친다. 안타까운 일이다.
성악설의 순자가 경계 했던 게 그것이었을까. 인간의 본성은 탈 예의를 꿈꾸는 것인가. 예의 바르고 올곧은 사람이 빛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인가. 그럼에도 그것은 어렵지 않지 않은가. 너무 쉽고 손아귀에 있는데 움켜쥘 수 없다니 말이다.
예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많다. 저 비용 고 효율이다.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 타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것, 남들보다 조금(쬐끔)더 정직해지는 것, 그 뿐일진데. 그 결과는 그 조금이 확실하게 타인과 구별하게 만들어준다. 늘 앞서가는 이름이 된다.
안동 의원 박경철은 자신의 저서 [자기혁명]에서 그것, 애티튜드(attitude)의 중요성을 5쪽에 거쳐 설파했다. 예절의 범주를 지극히 한정해 인사 태도만 놓고 말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능력 있는 사람보다 인사 태도가 훌륭한 사람에게 신뢰가 가는 이유가 바로 그러하다.
또한 인사태도가 좋으면 대게 능력을 수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는 이미 인사가치를 숙지하고 그 과정에 대한 학습 과정을 거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구 게임에서 한 승급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승급가치는 전급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시간 예절을 행하는 방향에서 노력했다면, “괜찮은 사람”이라는 기분 좋은 평판을 생산했을지 모른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선거에 뛰어든 사람들이 평소 이 방향에서 줄곧 노력하면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몸에 익지 않은 행위는 긴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어느 순간 편해지고 만다. 친절이라는 구실이다. 그러나 그 친절한 이는 늘 무례와 교만을 기억한다.
공자의 제자 안회가 흙 들어간 밥을 먹은 건 예절보다는 숭배에 가깝다. 당시에는 그 행위가 예절의 범주에 있었지만 현대에 이르러선 예절은 적당하고 편해졌다. 사자소학에 나오는 구절 따윈 케케묵은 아재개그다. 그럼에도 그 분명하고 달콤한 마시멜로를 챙겨 먹을 수 없다니 문득 인간의 영특함이 정말 원숭이를 넘어섰을까 하고 갸웃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필자도 실천이 어려워 일찍이 포기한 커리큘럼(curriculum)이다. 지금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시간을 당구 승급에 투자한다. 미친 짓이다. 지금이라도 몸에 익히고 습관화 되면 높은 인격체로 거듭 날 수 있으련만, 아쉽게도 그것은 늘 품절이다.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래도 우리 고을이 예절의 실천에선 월등하다. 몸짓과 어휘가 그러하다. 학문과 양반고을이라는 자부심이 오늘을 이뤘으리라. 그럼에도 늘 조금이 아쉬울 수밖에 없는 분야다.
가끔 예절 교육 현장을 본다. 손을 가지런히 어디에 두고 허리를 얼마를 굽히고 눈동자는 어디를 향하고… 그런데 필요성과 대가성이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인사를 칭찬 받자는 목적을 두고 하는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성품과 인격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목적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