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판타지
겨울 판타지
  • 문틈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8.12.1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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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면 모든 생명들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여름의 무성한 초록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본디 모습으로 돌아간다. 벌레들은 알을 슬어놓고 죽거나 고치를 지어 그 속에 들어가 잠든다. 굴 속에 들어가 동면에 들어가는 동물도 있다. 풀들은 씨앗을 얇은 흙이불 밑에 잠재워두거나 땅 속에 뿌리로 남아 봄을 기약한다. 나무들은 잎새를 다 떨구고 벌거벗은 채로 땅에 발목을 묻고 지낸다.

다들 오랜 지혜를 빌려 나름대로 추운 겨울을 나는 것이다. 겨울을 신나하는 것은 마을 하늘을 독차지한 까마귀 같은 새들뿐인 듯하다. 새들마저도 너무 추우면 얼어 죽을까 겨울을 비껴가는 법을 알아차린다. 산골짝 물조차도 바위에 얼어붙어 흐름을 멈춘다. 이러한 겨울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으면 모든 생명들은 반드시 한번은 겨울을 통과한다는 것이 보인다. 그것이 죽음이든 잠이든 어떤 형태로든 겨울을 체험하고 나서야 다시 새로운 생명을 꽃피운다.

겨울은 만물이 가장 편안한 자세로 돌아가는 때다. 사람이 잠을 잘 때 가장 편안한 자세는 모로 누워 다리를 구부리고 자는 자세라 한다. 그것이 어머니 태속에 있을 때의 가장 편안한 자세다. 이렇게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나면 겨울은 기다렸다는 듯이 하얀 눈으로 만물을 덮어준다.

만일 눈이 내리지 않은 채 추위가 계속된다면 땅은 꽝꽝 얼어붙고 만다. 일이 그리 되면 땅 속의 씨앗들, 구근 같은 생명의 저장고들은 다 얼어 죽어 새 봄을 보지 못한다. 눈이 와서 대지를 푸근히 덮어주어야 땅은 털옷을 걸친 북극곰마냥 살아 있다. 눈이 많이 오면 농사가 잘 된다는 것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눈이 내리는 날 정한 마음으로 한번 겨울을 바라보라. 나목의 실가지 끝에 눈이 내려 쌓인다. 마당에도, 장독대에도, 담장에도, 함평장으로 가는 길에도 눈은 마치 하얀 천으로 모든 물상을 다 감싸듯 내려 쌓인다. 퐁뇌프 다리를 황금빛 천으로 둘러쌌던 설치미술가 크리스토 자바체프Christo Javacheff)는 눈이 세상을 감싸안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겨울은 세상 모든 것을 눈으로 덮어놓고 만물이 잠든 속에서 다시 시작을 준비한다. 사람이 죽으면 하얀 시트로 죽은 몸을 덮어주는 것도 어쩌면 같은 뜻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진정으로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살아나고 또 살아나는 것이라고. 겨울을 주시하고 있으면 세상 이법을 알 것도 같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죽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이 말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찌하여 봄에는 다시 만물이 소생하는 것일까, 이것 역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겨울이라는 부활의 마법을 준비하는 과정이 있으므로 이 모든 기적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라.

겨울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하여 태속에서, 눈 속에서 지하운동을 한다. 봄, 여름, 가을까지는 열심으로 길쌈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찬란했는데 겨울은 텅 빈 채 손을 놓고 있다. 그렇게 보인다. 그렇지만 암암리에 보이지 않는 활동을 한다. 왜 그럴까. 정말 이 우주의 주인은 생명이라는 말일까. 우주에 끊임없이 무엇인가 살아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일까.

푸른 잎들, 아름다운 꽃들, 빛나는 열매들, 초록들을 겨울은 찾아보라고 하는 것 같다. 그것들은 이미 한 순간의 환영처럼 사라져버렸는데도. 실제였던 것인지조차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대자연의 순환 고리에 매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의 한 축이다. 겨울 속에서 우주가 하는 일을 짐작해보고 삶과 죽음을 생각해본다. 시인 릴케는 삶 속에는 과육의 씨처럼 죽음이 있다고 했다. 모든 비밀은 겨울이 감추고 있는 듯하다.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겨울숲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을 목격한다. 겨울은 인도-유럽어 wind(white)에서 즉,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하얀 겨울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겨울은 만물을 흰 시트자락으로 덮고 그 밑에서 생명이 죽음에서 부활을 잉태하는 엄혹한 시기를 보낸다.

겨울에 할 일이 없던 예전 사람들은 사랑에다 볏집을 가져다놓고 둘러앉아서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짰다. 이제 그럴 일도 없으니 자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짜볼 일이다. 거기 씨처럼 진정한 겨울 속의 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니. 아, 지금 매우 추운 겨울의 어디쯤에 부활의 봄을 꿈꾸는 오랜 나라의 공주는 잠들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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