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 김인후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서
하서 김인후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서
  • 황정 박장수
  • 승인 2017.07.31 11:12
  • 호수 6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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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몽재 입구에 다다르니 개천을 끼고 오래 묵은 느티나무아래 마을정자가 눈에 들어와 사진을 찍고 있는데 동네 주민은 아닌듯한 어여쁜 여자분들이 다가와 사진을 부탁했다.

이 마을이 친정이라 동창생끼리 단체티셔츠 맞춰 입고 서울에서 여행 왔단다.

훈몽재 앞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오뉴월 뙤약볕이고 후텁지근한 날씨에 땀이 비 오듯 흐른다.

훈몽재는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를 거쳐 백방산 자락 아래 추령천변에 자리하고 있다.

하서 김인후선생이 처음 훈몽재를 지은 곳은 대학암 위쪽이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하서선생의 5세손인 자연당 김시서가 1680년경 인근에 자연당을 짓고 기거하며 훈몽재를 중건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세월이 흘러 훈몽재가 퇴락하자 후손과 유림들이 다시 점암촌에 훈몽재를 중건하고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 김시서, 송강 정철, 율곡 이이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1867년(고종 4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훈몽재가 중건되었으나 1951년 6·25 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고 이후 순창군에서 하서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되살리고 후세에 전승·발전시키며, 나아가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예절·유학 등 전통문화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2009년 11월 9일 현재의 위치에 훈몽재를 중건하고 동년 11월 29일 개원하여 지금의 건물이 되었다.

본래의 훈몽재 건물은 지금 건물 왼편에 훈몽재 유지가 있으며, 최초 전주대학교 박물관 팀에 의하여 2005년 발굴조사 결과 표토층의 10~20㎝ 아래에서 훈몽재의 유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현재는 복토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훈몽재 건물을 둘러보며 사진작업을 하던 중 이곳저곳에서 한문책을 들고 다니며 암기에 열중하고 있는 대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물어봤더니 원광대와 전주대 한문교육학과 학생들이라고 한다.

본래 원광대는 한문에 조회가 깊으며 전주대는 이곳 훈몽재유지터를 발굴하는데 기여한바 있어 이곳하고 인연이 깊다.

무언가를 열심히 암기하며 공부하기에 ‘무슨 책이냐’고 물었더니, 대학·논어·맹자·중용 중에서 대학을 공부하며 암기하고 있다고 답했다.

한마디로 사서삼경중 사서를 공부하고 있는 중인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유교 내지는 한문을 공부하려면 사서삼경은 필수 코너 인 듯하다. 하서선생이 지금 이들을 보신다면 매우 흡족해 하시리라.

훈몽재에서 강학하셨던 하서선생 뜻을 이어받은 제자들이라는 생각에 기특했다.

예전 훈몽재 자리와 인접하여 현재의 건물은 훈몽재와 부속건물인 자연당, 양정관, 심연정이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 추령천변에는 대학암(大學巖)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송강 정철이 이곳에서 하서선생에게 대학을 배웠다고 한다.

대학암을 찾다 훈몽재 앞뜰에서 커다란 바위를 발견했다. 안내 표지판에 고인들이라 적혀 있는 걸 보니 이곳을 지을 때 고인돌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참을 찾아 헤매다 훈몽재 앞 추령천 물가에서 대학암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대학암’에 새겨진 글씨를 찾느라 난데없는 숨은그림찾기를 해야 했다.

드디어 바위 북쪽 3/2부근, 강가 쪽 측면에 ‘大學巖’(대학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글씨가 송강정철의 친필 글씨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곡성 옥과 영귀서원으로 이동하는 길, 근사한 메타세콰이어 길을 만났다.

지도를 보아하니 곡성,옥과를 가자면 어차피 순창시내를 지나서 가야 한다.

구불구불 산길을 넘어 내리막에 월정 저수지가 있다. 올 들어 가뭄이 극심하더니 요 몇 일사이 비가 내렸다. 그런데도 저수지 물은 메말라 있다.

저수지 상류 바닥은 들어나 보이고 하류 중에서 제일 깊은 곳 댐 바로 아랫녘 또한 물 수위가 많이 낮아져 있다.

장성은 장성호로 인하여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짓고 있지만 사실 전국이 극심한 가뭄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이 조선시대라고 가정하면 보릿고개도 지난 이때까지도 비가 내리지 않으니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속출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우제를 올려도 열 두 번은 더 올렸을 법 하다. 하서 조선시대에는 기우제를 자주 올렸다고 한다. 매년 두 번은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보통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명종실록’의 ‘기우제를 거행하도록 전교하다(1554)’ 내용을 보면 “요사이 날마다 동풍(東風)이 불고 햇빛이 내리쬐다가 어제와 오늘은 하늘에 구름이 끼기에 소나기가 내리려는가 여겼었는데 비 내릴 기미가 전연 없다. 가뭄이 이러하니, 전일 소격서(昭格署) 및 마리산(摩利山) 참성(塹城)의 초제(醮祭)와 (마리산 참성은 강화부(江華府)에 있다) 기우제(祈雨祭)는 형편을 보아서 하라고 전교한 것을 근일 중에 시급히 거행하고, 진암(辰巖)에서 분신(焚薪)할 것도 아울러 해조에 이르라”(진암은 양주(楊州)에 있고, 분신은 역시 기우하는 일이다)[명종실록 017권 명종 9년 7월 18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하서 선생은 장성에 기거할 때이므로 황룡강의 물이 메마르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가뭄으로 인한 큰 피해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히려 생가 터인 맥호리 앞에 문필천이 있어 비가 많이 오면 물난리에 걱정이 더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글쓴이가 주관적으로 작성한 기행문으로, 내용 중 일부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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