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의 숨은 인물을 찾아서
장성의 숨은 인물을 찾아서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7.06.05 11:02
  • 호수 6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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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의(殉義)충신 직방제(直方齋) 김보원 의병장

혈서로 절명시를 쓰고 남강에 몸을 던지다 다음날 새벽 안타깝게도 순성장 황 진이 적의 탄환에 맞아 숨지게 되었고 그러는 사 이 동쪽성에 흙무덤을 파고 적이 잠입하니. 공은 이종인 등과 함께 소수의 병력으로 죽 을 힘을 다해 막았으나 사면 성벽을 뚫고 적들이 판자로 몸을 가리고 개미 때처럼 처 들어 오는데 활을 쏘는 대오는 이미 무너진 데다 병사의 수는 중과부적이고 설상가상 으로 화살과 탄환이 다하여 의병 등은 맨몸 으로 육박전을 전개했으나 대세는 이미 기 울어 있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직방제 공에게 피할 것을 권하였으나 “이곳이 바로 내가 죽을 곳인데 어찌 이곳을 버리겠소” 하고 손으로 왼쪽 소매를 찢어 혈서를 써서 타고 있던 말의 목에 걸어주며 “네 비록 미물이나 능 히 나의 뜻을 알 것이다.이 글을 잘 간직하 여 고향집에 돌아가 내 뜻을 전해다오”라고 말한 뒤 삼장사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와 함께 성의 남쪽 초루에 올라 최경회가 최후 의 시 한수 읊었다. “촉석루 삼장사 술잔을 드니. 남강 물 웃 으며 손짓을 한다.

 이 강물 끊이지 않고 흐르듯 우리의 혼도 영원히 살리라” 하니 이에 공이 비장한 어 조로 “하찮은 선비, 천리에 의를 세워 싸우 다가 삼현과 더불어 나라위해 죽으니 어찌 한이 있으리오(一箇寒士千里赴義 與三賢同 死 死亦何恨)”하며 응대하여 절명시(絶命 詩)를 지어 낭독하니 서로 껴안고 통곡 한 후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니 이날이 1593년 6월 29일로 공의 나이 51세였다. 나흘 후 7월3일 어두운 밤, 공의 집에 갑 자기 말의 울음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평소 공이 타던 말이라! 이 말은 공이 창의하기 전에 얻은 말로 원래 소금수레를 끄는 말이 었으나,공이한눈에쓸만함을알고시험 해보니하루에능히수백리를가는지라. 그후공은이말과함께많은전투에참가 해빛난전공을세우게한공의분신이나 다름없었다. 말의 목에 혈서가 있어 펼쳐보니 “계사년 6월 29일에 진주에서 죽는다”고 쓰여 있는 지라 부인이 혈서를 끌어안고 통곡하며 “아 녀자의 몸으로 전투에 나가 복수하기는 어 려우나어찌나홀로살아유유히생을살 아갈 것인가, 마땅히 남편을 따라 죽으리 라”하고, 아들 한룡(翰龍)과 김천일공의 차 남 상곤(象坤)으로 하여금 진주로 가서 혼 을불러모셔오고,평소공의머리카락과치 아로대신입관하고혈서를같이묻어장사 지낸후,3일만에부인또한공을따라자 결하여 절의를 세우니 이분이 바로, 나중에 열녀의 정려를 받은 성씨(成氏)부인이다. 안타깝게 묻혀버린 직방제 공의 충의 정신 열녀 성씨는 창녕사람으로 생원 기지(己 智)의 따님이시다. 공은 외아들인 한룡(翰 龍)을 두셨고, 한룡공은 시진, 시탁 그리고 첨지(僉知) 시갑 3형제를 두셨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겪은 참담함 을 어찌 글로 다하겠는가? 왕이 피난가 온 나라가 폐허가 됨에 이르러, 신하된 자들은 왕을 섬기다 국난을 당함에 목숨을 바치는 일을 당연한 일인 것이다.

직방제 김보원공의 묘전에 선 김병조씨 또한 전라도와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 등 지에서 의병을 일으킨 대부분의 의병장들 은 전직 관료들이 대부분이나, 일생동안 나 라의녹을받지않고,백면서생으로의를세 워나라를위해앞장서서적과싸우다가순 절한자 과연 몇이나 될까? 직방제 김보원 의병장은 나라에 녹을 먹지 않았으니 임금에게 빚진 것이 없었으며 전 라도의 벽지에 살았으니 스스로 전장에 나 서지 않았으면 왜적과 대적할 일도 없었다. 직방제공이세상에이름을떨친많은의 병장보다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는 까닭은 바로 이와 같기 때문이다. 그부인성씨또한부군과이별한날에 보여준그의연함과또한남편을따라순철 한그절의는만고의열녀요남자못지않은 열사이다. 특히,평소타던말또한주인의그의열 을알아천리길에그뜻을전하니이는공 의충의에짐승인말도감동한것이아니겠 는가? 이렇듯공이남긴충의의사실과의병정 신을후세에알려현창하고이어받음이후 손들의 도리이다. 당시 장성군에서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순국한 사람이 적지 않았 고,혹이름을얻은이도있고혹공은있으 나그공이묻힌자적지않았다. 당시가 아니라도 시간이 지나 자손 등의 신원과사림의청으로크던작던거의다 조정으로부터 포상의 은전을 받았으나, 공 의그간의전공과순절사실은삼장사와더 불어 우뚝한데도 그 공이 250여년이나 묻혀 있었다. 이를 안타까워 하던 호남사림의 주청으 로 철종 원년 1849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 로 말직인 충자위 부사용의 직이 내려지고 공의 공적에 비해 포상이 너무 미약하다는 유림의 의론에 따라, 다음해(1850)에 통훈 대부 공로좌랑의 직이 내려졌다. 하지만 유림에서는 이를 크게 원통하고 슬픈 일이라고 탄식하였다.

다행히 1849년 공의 의적이 호남절의록, 호남창의록과 장 성군지등에기록되어있어이를근거로하 여당시승정원동부승지이조형이공의행 장을쓰게됨으로공의행적이조금씩세상 에알려지게되었을뿐,묘전에비석하나없 이지내오게되었다. 1985년 장성유림들의 뜻에 따라 공의 증 조를 모신 추원제(삼계면 주산리 백산) 앞 마당에직방제공의충과열녀성씨부인의 열 그리고 종형 유유정(悠悠亭) 조원의 효 를기리기위해화산권용현선생의글로 한 집안에서 나온 삼강비를 세우고, 다음해 인1986년봄공의12대손인김춘수에의 해 묘전(삼서면 두월리 기동)에 산암 변시 연선생의 글과 벽송 이상용선생의 글씨로 순의비를 세우게 되었다. 산암 변시연이 비명에서 다음의 글로 직 호남절의사에 수록된 김보원공의 전공 내용 방제 공을 애도하였다.

 하서에게 글 배우고 율곡을 찾아 청운의 뜻을 세워 서울로 올라갔네 눈앞에 큰 화는 닥치는데 조정에서 양병설 저지되자 벼슬의 뜻을 접고 국난에 대비했네, 임진년에 왜적이 침범하니 우리군사 약하도다. 선영과 처자를 고별하고 수백 의병 일으켜 호남`영남 각처에서 연전연승 이루었네 진주싸움 수일 동안 왜적을 무찌르나 적은 수의 의병에다 화살마저 동이나 삼장사와 더불어 강물에 순절하니 물길마르지않듯영혼은죽지않네 공이타던말을보고부인또한순절하니 가문이 충열의 본보기라 포상훈격 가볍다고 애석하여 말들하니 감히붓을들어돌에새겨빛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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