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 날 기념 특집 ①장성의 숨은 인물을 찾아서
의병의 날 기념 특집 ①장성의 숨은 인물을 찾아서
  • 변동빈 대기자
  • 승인 2017.05.29 10:26
  • 호수 6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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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의(殉義)충신 직방제 김보원 의병장

본지는 6월 1일 의병의 날을 맞아 장성군의 숨은 인물 의병장 직방제 김보원 공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공적에 대한 기획기사를 보도한다. 나라에 녹을 받지 않아 임금에게 빚을 지지 않았음에도 나라를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여겼고,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였기에 공훈도 미약하였지만 후세에 잊지 않고 기억해야할 공의 충의 정신은 선비의 고장 장성의 자랑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혼으로서 기리 전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승정원 동부승지 이조형이 쓴 직방제 김보원공의 행장

<기묘명현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재>
임진왜란 때 선비로서 큰 공을 세운 의병장 김보원(金輔元) 공은 자(字)가 사미(士美)요 호는 직방제(直方齊)로 본관은 광산이다. 문숙공(휘주정)의 후손으로 고려말 두문동 72현으로 절의를 지키고 말년에 나주로 옮겨와 우정산 아래 은거하며 조선왕조로부터 세 번이나 우의정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은 절신으로. 장성 경현사에 배향된 사정공 자진(自進)의 현손이다.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태인현감 휘 숭노(崇老)의 손자이며 성균관 생원으로 효능참봉을 지낸 회(繪)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장흥고씨 진(震)의 따님이시다.

공은 1542년 중종37년 장성군 삼계면 백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용모와 기상이 출중하여 큰 아버지인 이조정랑 휘 약(約)공이 특히 아끼고 사랑하시어 “이 아이가 장차 우리집안을 빛낼 아이다”하고 종형인 유유정 조원(調元)과 더불어 하서 선생께 학문을 연마 하게 하셨다.

공은 선생문하에서 학문과 도학을 깊게 연마함은 물론 천문. 지리. 병법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성품 또한 강직하였고, 특히 효심이 깊어 정성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양친이 돌아가심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몸이 상할 지경이었으며 죽을 먹으며 6년을 시묘하니 그 효성에 감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서 문하에서 도(道)를 익힌 공은 그 후 종친인 예학의 거두 사계 김장생 선생과 함께 예학을 강론하였고 공의 나이 39세인 1581년에는 멀리 한양으로가 율곡선생을 뵙고 배움을 청하였다. 율곡선생이 처음 보았을 때에 공의 인물됨을 보고 크게 칭찬하며 “머지않아 나라위해 큰일을 할 사람이다.”고 예견하였다.

그 후 1583년 여름에 이르러 율곡선생의 10만 양병설에 크게 감명하였는데 당시 정부는 동서로 분당이 되어 다투게 되고 그의 탁월한 견해가 오히려 저지 받게 되자 나라 돌아가는 형세에 실의를 느끼고 벼슬을  통한 영달의 꿈을 접고 낙향을 결심하여 낭월산에서 무예를 익히며 손자병법과 제갈량의 팔진도법을 연구하고 매일 세 번 출사표를 외우며 전의를 다지며 닥쳐올 환란에 대비하는 한편 제봉 고경명. 건제 김천일. 수은 강항, 심우신등과 깊은 우정으로 의기를 투합하였다.

갑신년 봄에는 존경하던 율곡선생이 세상을 뜨자 천리길을 스승의 예로 조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옥천에 들러 중봉 조헌을 만나 시국에 관하여 토론하고 몇 마디 말로 뜻이 통하여 도를 함께 하기로 하였다.

1591년 황진이 황윤길과 함께 선전관으로 일본에 다녀와 동복현감으로 부임할 때 찾아가 일본 적정(敵情)을 탐문하였고 좌수영에 들러 이순신 장군을 만나 거북선을 살펴보고 충무공의 탁월한 식견에 깊이 감탄하고 돌아왔다.

<왜적의 침략에 가솔을 이끌고 나가>
그해 가을 권율이 광주목사로 부임하자 찾아가 황진공으로부터 들은 일본정세를 토론하며 만일의 경우 함께 싸워 죽기로 굳게 약속하였다. 그러나 예견 했던 대로 1592년 4월 왜적의 무리가 침략하니 제대로 방비 하지 못한 전국의 진지는 순식간에 풍비박산 되고 황망한 조정에서는 급히 임금이 의주로 피난 가게 되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에 도원수 권율의 격문이 다다르고 특별히 공이 창의를 권면하니 공은 사촌형 상지헌(尙志軒) 찬원공에 통곡하며 말하기를 “대대로 국은을 입은 집안의 후손으로 어찌 국가의 위기를 앉아 보고만 있겠습니까 나가 싸워 죽겠습니다. 원컨대 형님은 이곳에 남아 계속 의병을 모아주시고 계속 군량미를 보내주십시오”하고 선조의 사당에 고한 연후. 부인 성씨(成氏)에게 결별을 말하며 “대장부로 태어나서 뜻을 세움에 생사 귀환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니 부디 아이들을 잘 키워 가문의 명성을 이어가길 바라오”하니 부인은 눈물을 애써 삼키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싸우시되 여의치 못하시면 죽음으로 국은(國恩)에 보답 하십시오”라고 답했다.

말을 마친 공은 집안의 장정 수십여 명과 의병200여 명을 이끌고 이치(梨峙)에 진을 치고 있던 권율의 막사로 가니  크게 기뻐하며 공을 종사관으로 삼으며 하는 말이 “일개 백면서생으로 국난을 당하여 이같이 큰 뜻을 세우니 어찌 가상치 않은가”하였으니 그날이 1592년 7월 8일이었다.

다음날부터 전투에 참가한 공은 일당백의 정신으로 왜적을 무찔렀으나 적과 아군의 피해가 너무 커서 의병장 다수가 전사하고 황진공 또한 부상을 입게 되니 이 전투가 바로조선군 최초의 승리였던 이치전(梨峙戰)으로 공은 권율. 황진 등과 더불어 끝까지 적을 막아낸 의사로서 호남절의록이치전기(湖南節義錄梨峙戰記)에 기록되어있다.

이후 8월에 중봉 조헌, 팽의장 심우신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청주전에 참전 승리함으로서 청주를 수복하는데 공을 세우고. 권율이 북쪽으로 근왕함에. 공 또한 참모로 많은 지략을 발휘하였으며. 12월 에는 도체찰사 정철의 명을 받아 옥천. 상주. 선산 등지에서 왜적 20여 명을 살상하였고. 황간에서는 유격전술을 발휘하여 왜적 50여 명을 살상하였으며 창원전투 왜적 50여 명. 함안전투에서는 왜적 40여 명을 베어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치전에 참가한 권율, 황진 등과 함께 직방제 김보원공의 이치전 동전록

다음해 1593년 4월말 왜장 가등청정이 전년도 진주성 싸움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병사 30만으로 동래로부터 진격해온다는 첩보를 받게 되자. 공은 창의사 김천일. 경상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복수장 고종후 등과함께 진주성에 입성하니 성안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추대로 김천일과 최경회가 도절제가 되고. 황진은 순성장. 공은 참모겸 전투 대장이되어. 심우신. 고응길. 박언준 등과 성을 굳게 하니. 명령계통이 분명하고 서로의 약속이 분명하여 명나라 장수 유정이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고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의사(義士)아닌자가 없구나”하며 감탄 하였다고 한다.

6월21일 까지는 적들이 성을 포위만하고 백 여리에 개미새끼 한 마리 움직이지 않더니. 그날부터 8일 사이에 적이 육박해오니 그에 대응하여 적 수천 명을 베게 되니. 모두 공의 책략에서 기인한바 컸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이 기사는 직방제 김보원 공의 13대 손인 김병조씨의 자료 제공 및 구술 등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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