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촌마을을 아시나요?
원촌마을을 아시나요?
  • 기현선 기자
  • 승인 2016.06.07 09:21
  • 호수 6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재 상무대로 편입된 풍요로웠던 마을

“지금 상무대 입구 쪽이 전부 학성리 였다. 우리 원촌 마을은 학성리 안에 있었는데 다들 넉넉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마음만은 부자였다”

원촌마을의 이야기를 꺼내자 마을에서 20년을 살다가 나왔다는 이용자(69)씨 표정에 따듯함이 피어올랐다.

원촌마을은 학성리를 이루는 학동,내봉,자동,회성마을과 더불어 태청산 남쪽과 장암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었다.

태청산과 장암산을 넘으면 영광군 묘량면과 대마면이 나오고 태청산의 남동능선을 경계로 동북쪽은 삼서면 신평리이며, 동남쪽은 유평리, 남쪽은 대도리였으며, 학성리는 영광장과 사창장을 오가는 사람이 많아 교통의 요지 였고 덕분에 주막이 성행했다고 한다.

특히 젊은 사람이 많이 살았던 원촌마을의 경우에는 아이들이 많았으며 마을도 컸다.

원촌마을에서 30여년을 살다가 지금은 사창의 내계리에 살고 있는 박종대(63)씨는 “내가 삼서 서초등학교 15회 졸업생이다. 마을에 주민도 약 300여명정도 있었고 아이들도 많았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았던 중고등학교 선배님들은 장성이나 영광, 임곡, 삼계, 광주 등으로 으로 학교를 다녔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원촌 마을은 마을의 북쪽 능성 경사면에 돌무덤이 있던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 꽤 오래전임을 알 수 있으며 임진외란 당시에는 이곳에서 심우신 장군의 지휘 아래 의병의 훈련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70년대부터 원촌 마을에 살다가 1990년도에 이사를 나와 현재는 상무대 입구에서 살고 있는 이용자 씨는 “마을사람들이 대부분 쌀이나 보리농사를 지었는데 간간히 사과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었다”며 “그때만 해도 사과 값이 좋아서 사과가 트럭으로 한 대 나가면 그 트럭으로 돈이 한 대가 들어온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고 이야기 했다.

이것은 기록으로도 남아있는데 ‘장성마을 이야기-삼서면’ 편에 나오는 원촌마을 기록에 따르면 1975년에 몇몇 사람들이 1ha에 사과농사를 시작해 2년 후에는 13ha로 커졌으며 1985년에는 27ha까지 커지기도 했다.

이밖에도 원촌마을에는 밤나무도 약 4천5백주 가량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이씨는 “마을에 밤나무에서 나오는 밤을 팔아 마을 공동기금을 하기도 하고 집집마다 조금씩 나누기도 했다. 이 돈을 나눌 때는 마을에 오래 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똑같이 나눴다”며 “돈도 돈이지만 서로 텃세부리지 않고 챙겨주는 모습에 다른 마을 사람들이 많이 부러워 한 것 같다”고 웃으며 자랑했다.

또한 이용자 씨는 “마을을 사람들끼리 단합도 정말 잘 됐다” 며 “시골 마을 치고는 큰마을이다보니 구판장도 있었고 창고도 50평으로 크게 있었다. 마을회관도 20평짜리로 있었는데 비가 오면 농사일을 쉬고 마을회관이나 공터에 모여 막걸리를 마시면서 윷놀이를 하는 것이 일이었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어 “마을어르신의 환갑잔치에는 누구네 집이건 상관 모든 여자들이 나와 흰 저고리에 파란색 치마를 함께 차려입고 음식을 장만했었다. 또 대보름이 다가오면 여자들이 미리 강강술래를 연습했는데 다들 낮에는 시간이 없으니 밤에 나와 동네사람이 직접 불러주는 창에 맞춰서 연습을 하고 대보름날에는 다 같이 한복을 맞춰 입고 나와 강강술래를 하기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마을에 대한 정이 끈끈해 아직도 마을의 향우회를 하고 있다는 원촌마을 사람들은 서울로 이사 간 사람들도 많아 그곳에 사는 사람들끼리 따로 향우회를 열기도 한다.

이씨는 “우리 마을이 상무대로 들어간다고 했을 때 마을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당연했고 이웃마을이나 외지 사람들도 참 안타까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태청산의 물을 바로 가져다 쓸 만큼 산도 좋고 물도 좋았으며 사람들끼리는 더없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더 많이 배운 사람이 있었다면 여기를 지켰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 90년도에 원촌마을이 상무대에 편입되고 마을을 떠나야 했던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고자 마지막 마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고 현재 상무대 입구 주차장 근처에 마을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망향동산’ 이라는 비를 남기기도 했다. 이 비석에는 그 당시 마을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이용자 씨는 “마을이 상무대로 편입 되기 전 마을의 모습을 찍어둔 영상을 보면 지금 봐도 ‘여기는 누구집’, ‘여기는 누구집’ 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눈에 선하다. 원촌마을에 살 때가 정말 재미있고 좋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어른들은 지혜로웠고 젊은이들은 단합이 잘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전라남도 장성군 영천로 168 3층
  • 대표전화 : 061-392-2041~2042
  • 팩스 : 061-392-2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변동빈
  • 법인명 : (주)주간장성군민신문사
  • 제호 : 장성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184
  • 등록일 : 2003-07-04
  • 발행일 : 2003-08-15
  • 발행인 : 류이경
  • 편집인 : 변동빈
  • 장성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성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snews1@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