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 윤동주, 빼앗긴 조국, 목숨과 바꾼 조국애
북간도, 윤동주, 빼앗긴 조국, 목숨과 바꾼 조국애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6.03.18 16:12
  • 호수 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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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보다 간절했고, 사랑보다 더 뜨거웠던 조국해방

<윤동주라는 사람>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길림성 용정시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에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가족들을 이끌고 1886년경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할아버지 윤하현은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어머니 김용은 목사이며 독립운동가인 김약연의 누이동생이다.

윤동주의 생가가 여덟 간 기와집으로 간도 지방의 가옥 대부분이  방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달리 네 개의 방과 부엌 대청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아버지가 상당히 부유한 지주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윤동주 뿐 아니라 고종 사촌인 송몽규도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와 일본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였으니 넉넉한 집안이었음에 틀림없다.

윤동주의 할아버지인 윤하현 등이 명동촌 일대에 6백만 평(약 2000ha)의 땅을 개간하여 10분의 1을 교육에 사용하기로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들의 교육열도 보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는 어려서 목사이며 독립운동가인 외삼촌 김약연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모 윤신영은 서울에서 유학을 하고 명동학교 교사로 있던 송창희에게 시집갔는데, 그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윤동주의 당숙은 윤영춘으로 가수 윤형주의 아버지다. 윤형주가 윤동주의 6촌인 재종 동생이 된다.

윤동주의 어릴 때 이름은 해환(海煥). 동생은 달환(達煥)으로 해와 달의 음을 빌어 해처럼 빛나라는 의미에서 불렀다고 한다.
윤동주는 소심하면서도 맑은 성격으로 피부도 희고 깨끗했는데, 성품이나 언행이 선비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윤동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자체가 맑고 깨끗한 사람이며 조용했지만 항상 미소 짓고 있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서구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으로 요즘말로 핸섬하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하지만 수줍은 성격의 그는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단 한 번도 사랑을 고백해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서시가 세상에 빛을 보게 한 후배 정병욱은 그 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적었지만 반말을 하지 않고, 정형이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했다고 한다.
이는 윤동주가 자신의 친필 원고 1부를 정병욱에게 맡길 때, 표지에 '정병욱 형 앞' 이라고 써 놓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스물여덟 윤동주가 아름다운 것은>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그가 의과대학 또는 법과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출세 또는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는 의사나 법관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순수 청년 윤동주는 생각이 달랐다.
잃어버린 조국의 현실에서 자신의 편안한 미래를 꿈꾸기보다 고뇌하고, 아픈 시인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더구나 1930년대부터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학교에서 한글 사용을 금하고, 일본어로 된 교육을 강요했으며 강압과 회유를 거듭해 1940년대부터는 대부분의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했기 때문에, 윤동주가 시인의 길을 택하고 잃어버린 조국의 슬픔을 한글 시로 써내려간 것은 그가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1920년대까지 독립운동을 했거나 민족자주를 부르짖었던 인사들이 1930년대 중반부터 대부분 일제의 강압에 견디지 못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기 때문이다.
숭실중을 졸업한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에 진학하였다. 윤동주의 서시를 비롯한 많은 시들이 이때에 쓴 것이다.

대학 졸업 후 학문에 대한 열의로 유학을 결정한 그는 1942년 일본 도쿄 릿쿄대학을 다니다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하지만 유학을 포기하고 1943년 귀국하려던 도중 일본 경찰에게 연행되어, ‘재 교토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죄명으로 2년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수감된 뒤 1년 7개월 뒤인 1945년 2월 건강이 악화되어 뇌일혈로 병사했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온 윤영춘(윤형주의 부친)은 후쿠오카 형무소에 들러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계속해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송몽규도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뒤 한 달 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일본군의 혈액대체 실험을 위한 실험 재료로 쓰여서 사실상 살해당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혀졌다.

<윤동주의 스승 규암 김약연>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윤동주와 같은 집에서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 회고록에 “동주형은 학교 갈 때나 사석에서 만나면 매번 옷이나 신발이 새것처럼 깨끗하고 반듯했다”고 적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어렸을 때 스승이었으며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은 외숙인 김약연목사이다.
김약연 목사는 명동교회와 명동학교를 세웠으며 유학자의 꼿꼿한 성품과 기독교의 신문명을 받아들인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북간도의 대통령이란 이름이 붙은 인물이다.

명동촌과 명동교회, 명동학교를 이야기할 때 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규암 김약연 목사다. 북간도 3.1운동(3.13일 만세), 조선은행 15만엔 탈취사건, 청산리 전투, 헤이그 특사 등 항일 독립운동에 가장 큰 사건들에는 늘 김약연 목사가 있었다.

김목사는 1868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8세 때 당시 회령의 유학자였던 남종구, 오삼열 선생에게 10여년 동안 한학을 배웠다.
김목사는 1899년 가족들과 10여 가구의 친지들을 이끌고 현재의 명동촌을 개간하여 한인촌을 설립하였다.

1901년 5만평의 토지를 매입하여 학전(學田)으로 삼아 규암재라고 하는 사설 교육기관을 창설했다. 1908년에는 명동서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06년 용정에서 이상설의 주도로 설립되어 운영되다 일제의 탄압과 운영난으로 폐교된 서진서숙의 민족교육을 계승하였다.
1909년 김약연은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확대하여 초대 교장이 되었다.

민족교육을 통한 조국의 독립을 꿈꾸던 김약연은 간도 한인회장을 맡아 동포들의 권익을 위해 청나라와 담판을 짓는 등 교육과 동포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섰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독립선언문이 입수되자 명동학교에서 이를 대량으로 복사하여 용정 일대에 뿌리고, 3.13일 만세 운동을 벌였고, 18명이 피살되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김약연목사는 결국 1920년 독립운동의 수괴로 체포되어 연길감옥에 구금되어 3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1928년 나이 예순 살에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었으며 1929년 명동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죽는 날까지 조선의 독립과 간도 동포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으며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 등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명동촌과 조선은행 15만엔 탈취사건>

3.1운동 이후, 간도지역 항일단체들은 비폭력 독립운동에서 무장투쟁으로 노선전환을 선언하고 항일무장단체를 결성했다. 하지만 무장독립단체의 건립에는 결사대 모집과 훈련 등에 따르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간도 15만엔 탈취사건은 군자금 마련의 일환으로 철혈광복단의 청년들이 치밀한 계획 속에 진행한 사건이었다. 일본의 조선은행자금을 직접 탈취하여 무기구입 등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려는 시도였다.
이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서기로 일하고 있었던 전홍섭의 제보가 결정적이었다. 1919년 12월 룡정은행으로 15만엔(일본화폐)을 수송한다는 정보를 입수 한다. 1920년 1월 4일에 은행 현금수송 인원들이 룡정으로 가는 길목인 동량어구에 매복을 하였다가 습격하여 탈취하였다.

탈취한 돈으로 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나 23일 목적지인 신한촌에 도착하여 그곳 요원들과 접선하여 대기 중에 반역자 엄인섭의 밀고로 전체 체포되어 비극을 맞이하였고 무기 구매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 일제의 명동촌에 대한 감시와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여행은 때론 설렘을 주고, 감동을 주며 오랜 추억을 만들기도 한다. 갑작스럽게 연길로 떠난 여행은 사실 별 기대가 없는 여정이었다.

하지만 옛 대성중학교를 방문했을 때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불태운 애국청년들의 사진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감출 수 없었고, 윤동주의 생가에 서서 가슴이 뭉클하여 차마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훈춘시 방천에서 한 땀의 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실감하였고, 한반도가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 기차를 타고 중국과 러시아를 여행하는 날을 혼자서 기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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