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변동빈 기자
  • 승인 2016.03.04 15:56
  • 호수 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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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사랑하며 목숨을 바쳤던 열사들의 발자취

한민족의 자긍심을 지키는 사람들이 살아가는곳

<도문(투먼)을 건너는 대형트럭엔>

일송정이 보이는 해란강
우리는 두만강이라고 부르지만 중국 사람들은 도문(图们)강이라고 부른다. 서쪽으로는 용정시와 동쪽으로 훈춘시 사이에 투먼시가 있는데 이곳이 함경북도 온성군과 연결되는 다리가 있다.
철로로 북한의 남양역을 거쳐 나진과 청진까지 연결되기도 한다.
다리 너머에 제법 많은 건물들이 보이고, 5층으로 보이는 건물도 눈에 띄었다. 마침 북으로 가는 대형 트럭이 쌀로 보이는 곡물을 싣고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하지만 교포들의 말에 의하면 예전보다 교역량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물론 북한과 중국 사이의 무역과 통행은 북한의 신의주와 중국의 단둥이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단둥은 압록강과 황해를 통해 신의주시와 접해 있으며 베이징과도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훈춘에서 나진과 선봉으로 가는 길이 새로 뚫리고 있지만 그 길은 중국이 동북 3성의 동해 물류를 운반하기 위한 것으로 북한과의 교류는 극히 적을 것이다.
고립되어 가는 북녘 땅의 동포들이 안타깝고 가슴 아플 뿐이었다.
훈춘에서 방천으로 가는 길에 검은 흙더미가 자주 보였다. 알고 보니 석탄이었다.
이곳은 주민들이 흙을 파듯 석탄을 캐서 말린 다음 땔감으로 사용할 정도로 석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지도를 보고서야 훈춘시가 북한의 그 유명한 아오지 탄광과 바로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돈이면 염라대왕 수염도 뽑아온다?>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50km를 굽이굽이 흘러가는 두만강은 중국과의 경계선기도 한다. 그런데 경계는 강 가운데가 아니라 중국 땅과 강이다.
따라서 철조망은 중국 땅에만 세워져있다.
두만강 중류인 무산, 회령, 투먼은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넘어오는 탈북민이 가장 많은 곳이다. 무산군은 유명한 청산리 항일 전승지와 도로가 연결되어 있고, 회령은 용정과 연길 그리고 투먼도 연길과 가깝다.
그런데 북녘 땅 곳곳에 감시초소가 있고, 군인들이 탈북은 물론 밀거래 무역을 감시하고 있었다.
겨울에는 두만강이 꽁꽁 얼어 건너기 쉽지만 눈에 띄기 쉽고, 여름에는 숲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밤을 이용해 두만강을 건넌다고 한다. 이곳에 두만강의 깊이가 사람의 키를 넘지 않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길 안내를 하는 중국교포에게 북한의 군인들이 감시를 하고 있는데도 어떻게 사람이 넘어오느냐고 물었다. 그는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지만 돈만 주면 염라대왕 수염이라도 뽑아 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돈이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다음으로 이동했다.

<선구촌에서 맞은 정월 대보름>

정월대보름 중국 교표가 차려준 상차림
선구(船口)촌의 지명은 배가 드나들던 곳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두만강 하류에서 중류까지 배가 드나들며 사람과 물자를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대부분이 교포들이 살고 있는데 중국교포들과 한족들은 집 모양으로도 구분이 가능하다.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우리 교포들의 집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고 한족들의 집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방의 구조도 우리 교포들은 온돌식 방으로 되어있고, 한족들은 방 가장자리로 걸터앉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또한 마당에 닭을 키우면 조선족, 거위를 키우면 한족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조선족들도 거위를 키우는 집이 여러 곳 있었다.
추운 지방이라 열 손실을 막기 위해 방은 하나로 되어 있으며 부엌과 방이 분리되지 않은 것이 특이했다. 서민들의 방은 하나로 되어 있는데 부자 집은 규모도 크고 방도 분리되어있다.
땔감은 나무나 옥수수 깡(옥수수가 붙어있던 곳)으로 사용하는데 불을 때고 나면 아궁이는 나무판자로 덮을 수 있게 했다.
선구촌은 제법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 한국의 농촌과 다를 것이 없는 노인들이 주로 생활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두만강이 흐르고 강 주변에는 벼를 심어 쌀을 수확하고, 산이나 밭에서는 옥수수를 재배한다고 한다.
길림성에서 생산되는 쌀은 맛도 좋고, 찰기가 있으며 향기도 있었다. 한 겨울에 먹는 쌀밥이 마치 한국에서 햅쌀밥을 먹는 것과 같았다.
선구촌에는 동행한 원광대학교 김범수교수의 제자에 부모님이 살고 있었다. 가는 날이 마침 정월 대보름이라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거위고기는 물론 한족들이 보름에 먹는 음식도 있었다. 고명이 들어있는 찹쌀떡을 튀긴 것과 비슷한 맛이었다.
특히 조선족이 먹는 순대는 우리가 먹는 순대와 전혀 달랐다. 돼지 창자에 찰밥과 돼지선지 등을 넣어 만든 순대는 아바이 순대로 알려져 있다. 조선족이 만든 막걸리는 단맛이 강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단술(감주) 맛과 비슷했다. 감주에 약산의 탄산이 섞인 것과 같은 맛이었다.
중국에서는 보름날 밤에 불꽃놀이를 하는 것이 가장 큰 행사였다. 밤늦도록 불꽃 터지는 소리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용정-애국열사들의 혼이 깃들어 있는 곳>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작곡자 조두남이 21세 때인 1933년에 만주 모란강에서 만든 선구자 가사다. 가사 첫머리의 '일송정(一松亭) 고개'는 독립투사들이 오가며 쉬던 곳이며, '해란강(海蘭江)'은 그 앞을 흐르는 강 이름이다.
해란강 위에 해란교에서 멀리 일송정이 보였다. 해란강을 건너 옛 대성중학교에 발을 디뎠다.

대성중학교는 현재 용정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21년 10월 8일 설립하였다. 민족주의자 강훈이 학교운영사 겸 교주였다. 일제의 탄압과 자금난으로 2년 8개월 폐교되었다. 1926년 박재하가 복교하였고, 폐교와 복교를 거듭하다 1946년 9월16일 대성, 동흥, 은진, 영신, 광명여고, 영신여자중학 6개 용정 내 중학교를 통합하여 옛 대성중학교 자리에 길림성립용정중학교를 설립하였고, 1985년 1월 용정중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용정중학교를 대표하는 인물은 누가 뭐래도 윤동주시인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대성중학교는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준열사와 문익환 목사 등 수많은 애국열사들이 배출된 곳이다.
대부분의 열사들이 스무 살 중반이었으며 1940년을 전후로 일제의 감옥에서 독살 당하거나 총살 당하였다.

*바로잡습니다 : 지난주(2월29일자)여행기에서 신의주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차가 아니라 청진과 나진을 지나 연해주로 가는 기차 입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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