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길을 걸으며
가을길을 걸으며
  • 문틈 시인
  • 승인 2015.09.30 13:33
  • 호수 59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서늘하다. 어느새 이 마을에 진주해왔던 매미떼들은 일제히 철수하고 대신 풀벌레들이 스며들어와 제각기 소리를 내지른다. 나는 매일 한 시간 정도 가까운 산길을 걷는다. 마을에서 가까운 길인데도 사람의 자취가 드문 길이다.

포장이 안된 맨흙길인 데다 오르내리는 좁은 산길이라서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는 듯하다. 호젓한 산길을 걷노라면 풀섶에 맺힌 이슬방울들이 함부로 신발이랑 바지가랑이를 적신다. 나는 그 기분이 싫지 않다. 키보다 훨씬 자란 우거진 풀숲 사이로 풀내음 숲내음을 맡으며 걷는 기분이 참 좋다.

길바닥에는 드문드문 밤송이들이 떨어져 있고, 어떤 밤송이는 떡 벌어져 그 안에는 익은 밤톨이 몇 개씩 짝지어 두려운 듯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나는 밤톨을 집어서 다람쥐며 새들더러 먹으라고 산쪽으로 내던져준다.

그렇게 혼자서 걷다보면 산길이 끝나고 영화장면 같은 기울어진 언덕빼기가 나타난다. 거기 서서 눈길을 동쪽 하늘로 던지면 .높은 바위 산자락이 시야 끝에 펼쳐져 있다. 나는 이 장면이 좋아서 흔히 산책길에 나선다. 한참을 시야 끝에 서 있는 바위산을 바라보고는 다시 오던 산길로 뒤돌아선다.

박목월의 싯귀가 떠오른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지어/아들 낳고 딸을 낳고/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나는 시방 흡사 어느 숨겨진 세상을 엿본 듯하다.

한 마장이나 될까싶은 이 작은 산길을 나는 ‘시인의 길’로 명명해두었다. 언젠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 가본 적이 있는데 강변을 따라 작은 숲길이 나있었다. 그 길 초입에는 임마누엘 칸트가 매일 걸었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 길 이름이 '철학자의 길'이었던가. 그 길에도 밤톨이 함부로 떨어져 있었다. 칸트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걸으며 위대한 철학자의 사유를 짐작해보았던 적이 있다.

혼자서 산길이나 들길을 걷는 것은 나 같은 사람이 사색을 하거나 시상을 가다듬기에 딱 좋다.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연과 교감하며 인생의 시작과 끝을 짐작해보는 그 시간은 참으로 값진 시간이다.

누구는 사람이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고 풀릴 길이 없는 이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정신에 병이 들기 시작한다고 경고하지만 인간은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라고 하지 않던가.
산길에서 풀잎 끝에 맑은 이슬방울들이 맺혀 있는 경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알는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밤중에 하늘이 슬그머니 내려준 것들이다. 떠들썩한 도시의 소음을 벗어나 한적한 산길에서 짙은 숲 향기를 들이마시며 자연으로부터 위안을 받는 시간은 비할 바 없이 소중하고 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산길도 몇 년 안 있으면 없어질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마을 주변에는 온통 산을 깎아내고 길을 내고 아파트를 짓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건물들을 짓느라 뚝딱거리는 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사람들은 결심을 한 모양이다.

이 지구를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결딴내기로.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그 멍텅구리 철학자가 갈파한 이후로 인간은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지구를 파괴하는 데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다. 어쩌면 이 산길을 걷는 것도 마지막 호사스러운 사치일지도 모른다. 맨 땅을 밟는 이 자연과의 스킨십을 방해하는 저 문명의 기괴한 파괴가 어디까지 가서 멈추게 될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한다. 나는 오늘의 나로 살고 있으니까.
신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신발 바닥에 묻은 황토흙을 털면서 걷는 산길이 나를 끌어안아 주는 듯한 행복감에 잠시 몸을 떤다. 문명이 아직 생채기를 내지 않은 이 나라의 순진한 가을 길을 모두 걸어보고 싶은 날이다. 이 나라의 순진한 길들아, 숨어서 그대로 있으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전라남도 장성군 영천로 168 3층
  • 대표전화 : 061-392-2041~2042
  • 팩스 : 061-392-2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변동빈
  • 법인명 : (주)주간장성군민신문사
  • 제호 : 장성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184
  • 등록일 : 2003-07-04
  • 발행일 : 2003-08-15
  • 발행인 : 류이경
  • 편집인 : 변동빈
  • 장성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성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snews1@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