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의 인물 노사 기정진
장성의 인물 노사 기정진
  • 장성군민신문
  • 승인 2012.01.13 11:03
  • 호수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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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내고장문화유산 - 김은숙 장성군문화관광해설사
장성은 예로부터 인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광나장창(光羅長昌)이라 하여 광주, 나주, 창평과 더불어 인물이 많이 난다는 칭송을 들어왔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은 '문장에 있어서 장성만한 곳은 없다(文不如長城)‘라고 했다. 또한 철종 임금은 '장안의 만개의 눈이 장성의 한 개의 눈 보다 못하다(長安萬目而 不如長城一目)’는 유명한 어록을 남기셨다. 이러한 말들은 장성의 훌륭한 인물과 문장을 두고 한 말이다. 여기에서는 흥선대원군과 철종 어록의 주인공인 노사 기정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노사 기정진의 생애-
노사 기정진(1798 - 1879)은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한주 이진상, 녹문 임성주와 함께 조선시대 6대 철인 중 한 분이신 성리학의 대가이다. 기정진의 본관은 행주이며 호는 노사, 시호는 문간공으로 전북 순창군 복흥면에서 때어났다. 노사는 7세에 이미 성리철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치고, 10세에 경서, 사서 등을 통독하였다. 18세 되던 1815년에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선대의 고향인 장성군 황룡면 하남으로 이사하게 되어 장성에서 여러 차례 집을 옮기며 살았다.
행주기씨 기정진 가문이 장성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기묘사화(1519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복재 기준은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으로 정암 조광조와 같이 성리학적 도학정치에 뜻을 두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희생된다. 그의 형인 기진과 기원은 화를 피하여 광주와 장성에 각각 정착하게 된다. 바로 기대승은 기진의 아들이며, 기정진은 기원의 후손이다.
노사는 1831년 34세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이후에 그 명성이 조정에 알려져 강릉참봉, 현릉참봉,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42년 45세에 전설사별제로 임명되자 취임 6일 만에 병을 핑계로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얼마 뒤 다시 평안도도사, 무장현감, 사헌부장령,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을 써서 삼정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 잡을 대책을 제시하려 하였으나 올리지는 못했다. 상소할 것을 포기하고 상소문을 불살라 없애려 했으나 아들이 보관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이를 방어할 시무책인 여섯 가지 조목을 개진한 소위 <육조소> 라고 불리는 첫 번째 <병인소>를 조정에 올렸다. 이는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 식견이 높게 평가되어 그해 6월 사헌부집의, 7월에 동부승지, 8월에 호조참의, 10월에 가선대부의 품계와 함께 동지돈녕부사 등이 주어졌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이어 공조참판, 경연특진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80세 되던 1877년에는 우로전으로 가의대부(정2품)가 주어졌다. 그 해에 장성 진원 고산리에 이사하여 그곳에 담대헌이라는 정사를 짓고 많은 문인들과 함께 교유하다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치게 되었다.

-노사 기정진의 사상과 업적-
노사는 화서 이항로, 한주 이진상과 더불어 근세 유학을 대표하는 3대 유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일정한 스승이 없이 깊은 사색과 명상으로 성리학의 이치를 스스로 터득해 자신의 사상체계를 세워 나갔다. 그의 5대조인 송암 기정익이 우암 송시열의 제자였기 때문에 노사는 일찍부터 기호학파의 적통인 율곡, 우암의 주기론(主氣論)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사는 주기론이 지배적인 기호학계에 속하면서도 이러한 이론을 따르지 않고 주리론(主理論)에서도 유리론(唯理論)이라는 적극적인 주리론을 확립했다. 그는 지역적으로는 호남에 살았지만 영남 유리론과 상통하는 특이성을 보였으며 정치사상면에서는 위정척사의 입장에 있었다.
노사의 이기론의 특징은 리의 절대화이다. 그에게 있어 기는 리와 상대가 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리 안의 일이며 리가 움직일 때의 손과 발 일 뿐이라며 리의 존귀함을 강조했다. 성리학에서 리를 강조하는 경향은 주로 이황 학파에서 보이지만 조선후기로 가면 이이 학파와 이황 학파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대표적인 학파로 기정진 학파를 비롯하여 이항로 학파와 이진상 학파를 들 수 있다. 이처럼 리를 절대화하는 학설이 나오게 된 데에는 이들이 모두 관직을 포기하고 향촌에서 학문에만 전념했던 재지학자들로 기존의 학파나 학설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봉건적 질서의 해체와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대내외적 위기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 글을 살펴보면 노사가 왜 그렇게 리를 절대화하려고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천하의 큰 변고가 셋 있으니 부인이 남편의 자리를 빼앗은 것과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은 것, 그리고 오랑캐가 중화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다. 만약 기가 리의 자리를 빼앗는다면 저 세 가지 변고는 다음의 일일 것이다.”
노사는 절대선의 세계로의 회복을 이루지 않고서는 어떤 힘으로도 그 시대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변적인 기보다는 불변적인 리에 절대적 가치와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실체화하려고 했다. 그 절대선의 세계는 자신들이 기반하고 있는 봉건적인 성리학적 질서와 체계였다. 따라서 노사가 누구보다도 강력한 위정척사론자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위정척사는 중국 송대 이후 여진족의 침공으로 중화문화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중화적 정통문화인 유교를 수호하기 위하여 주자가 역설한 사상이다. 원래 위정척사라는 말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은 배척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사(正邪)의 의식은 역사적 상황과 여건에 따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정통문화가 이질문화의 도전을 받았을 때 발생하는 의식이다.
조선왕조는 건국과 동시에 성리학을 국가지도이념 받아들여 정통사상으로 정립해 갔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서 성리학이 점차 형식화, 관념화되면서 그 본질을 상실해 가다가 천주교라는 이질적인 서학이 들어오자 유교질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위정척사사상은 싹트기 시작했다. 천주교가 전통사회를 위협하는 사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정학인 유교를 지키기 위하여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배척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주자학적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고 있는 조선왕조와 성리학자 입장에서 볼 때 천주교는 국가의 전통질서를 파괴하는 반국가적, 반사회적인 위험사상이었던 것이다. 위정척사사상은 주자학적 화이사상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성과 배타성,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이라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한계성은 한말의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애국우국의식으로 나타나 민족주의사상으로 승화되었다.
한말에 있어서 위정척사사상을 애국우국의식의 민족주의사상으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상가가 노사 기정진이다. 노사는 병인양요 때 올린 상소에서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을 정확히 간파하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내수외양론(內修外壤論)을 역설하였다. 내용은 이렇다.
" 첫째 대외개방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국론이 통일되어야 한다. 둘째 유사시에 대비하여 국내의 지세를 상세히 파악해야 한다. 셋째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적의 효율적인 관리와 국방력을 강화하여야 한다. 넷째 현명한 정책을 개진하게 하여 건설적인 정책을 대폭 수용하는데, 한글로 된 정책도 받아들여야 한다. 다섯째로 내정개혁을 착실히 수행하는 것만이 외세를 막는 지름길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 백성의 힘을 결집시킬수 있어야 한다.“
또한 노사는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이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과감한 개혁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사대부의 부패상과 향리들의 부정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삼정 문란의 폐해를 일일이 지적하면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토대로 제반 개혁을 추진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군포를 폐지하며 환곡은 면제하고 서원의 유생이 양민에게 끼치는 해독을 없애고 사치하는 풍토를 없애야 한다. 그리고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향거와 이선을 거친 다음 시험에 의하여 선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개혁책 중 전면적인 개혁론에 속하는 편으로 노사는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여 양민 위주의 개혁을 요구했던 것이다.
노사의 저서로는 당시까지 지속되었던 호락논쟁을 비판하면서 이일분수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납량사의 納凉私議>, 사단칠정 문제를 다룬 <우기 偶記>, 태극도설에 있는 정자에 대해 해설한 <정자설 定字說> 있다. 또한 이이의 이통기국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이통설 理通說>, 77세에는 <납량사의>의 몇 구절을 수정하고 81세에는 그의 이기론의 핵심을 이루는 <외필 猥筆>을 저술하였다
노사는 조선사회의 해체와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위기 속에서 리의 절대화를 추구함으로써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다. 그가 주창한 위정척사사상은 보수성과 배타성,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이라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을 극복하고 애민애국의식의 민족주의 사상으로 승화시켜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정재규 등 한말 의병의 정신적인 토대가 되었다. 또한 1960년에 노사의 후학들에 의하여 간행된 ‘노사선생연원록’이라는 제자록에 의하면 친히 글을 배운 제자가 600여명에 이르고 그들 제자의 제자들까지 합하면 6000여명에 이르는 노사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어릴 적 한 쪽 눈을 잃어 애꾸눈이었다. 한 쪽 눈으로 밖에 세상을 볼 수 없었지만‘장안만목이 불여장성일목’의 주인공이 되었다. 노사 기정진은 나라가 위기에 처한 어려운 시기에 나서 민족자존을 위해 몸부림치다 살다간 꼿꼿한 선비였다.
노사는 자신이 말년에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지었던 ‘담대헌’이 있는 고산서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진원면에 위치한 고산서원은 기정진을 주향으로 이최선, 기우만 등 8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신실인 고산사가 있고, 강당으로 담대헌이 있다. 동재인 집의재와 서재인 거경재가 있으며 담대헌과 거경재 사이에는 노사문집의 목판본을 보관한 장판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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